“가람 씨, 아직 멀었어? 이따 오후 주문도 해야 되는데. ”
“다 됐습니다. ”
오늘도 그는 주문이 들어온 물건을 포장하고 송장을 붙인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이지만, 괜찮다. 학창시절에는 제대로 공부도 못 하고, 대학도 포기하고 부모님께 손 벌리기 싫어서 아르바이트 뛰는 마당에 뭘 더 바라겠어. 이런 일이라도 감사하며 해야지.
“여기요. ”
“수고했어, 점심 먹자. ”
“네. ”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아는 형이 운영하는 작은 쇼핑몰에서, 포장 하는 일을 하지 않겠냐고 해서 같이 도와주고 있었다. 물건을 포장하는 직원이 있긴 했지만, 최근 쇼핑몰이 잘 돼가면서 사람을 하나 더 구한다며 그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점심을 다 먹고 오후 일을 하는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였다.
“여보세요? ”
‘진가람 전화 맞죠? ‘
“임마, 나야. ”
‘…나 서형이야. 기억해? ‘
임서형, 반에서 당찬 여자애로 유명했던 그녀였다. 그가 엇나가려고 할 때마다 등이나 정강이를 시원스럽게 차 만류하곤 했는데… 그녀가 웬 일로 전화를 한 거지?
“기억하지. 너한테 맞은 등짝이 아직도 아프다, 야… 무슨 일이냐? ”
‘오늘 동창회 한다고 다 모이는데, 너 오냐? ‘
“동창회? 오늘 동창회가 있었어? ”
‘뭐야, 연락 못 받았어? 오늘 동창회야. ‘
“어, 난 연락 못 받았는데… 어차피 선약 있어서 못 가. ”
‘어, 알았어. ‘
동창회가 있었다고? 그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같이 어울려 다니던 애들 빼고는, 어느 누구와도 연락을 잘 하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도 응답이 없고, 수능이 끝나자마자 번호를 바꿨거나 다른 이유로 전화조차 되지 않았다.
‘뭐여, 왜 나만 빼놓고…? ‘
그는 고등학생때 어울려 다녔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시성아. 나 가람인데. ”
‘어, 가람쓰. 웬일이야? ‘
“오늘 동창회 있는 거 알았어? ”
‘동창회? 오늘? ‘
“뭐야, 너도 연락 못 받았냐? ”
‘어. 나도 못 받았는데…? 너도? ‘
“어. 나도 서형이가 연락 해서 알았어… ”
‘그런 게 있는데 왜 우리한텐 연락을 안 했을까…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볼게. ‘
“어, 알겠다. 끊자, 나 오후 일 해야돼. ”
‘오냐, 수고. ‘
뭔가 석연찮았지만 그는 오후 업무를 해야 해서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늘 회식이라 못 가긴 하지만, 그래도 연락 정도는 해 줄 울 알았는데.
‘짜식들, 연락도 안 해주고 말이야… ‘
그 날 저녁, 막 회식을 마치고 퇴근하는 가람에게 전화가 왔다.
“여, 인진쓰. ”
‘너 어디야? ‘
“나? 지금 회식 끝나서 들어가는 길인데? 넌? ”
‘동창회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이지. ‘
“뭐야, 너한테는 연락 왔어? ”
‘시성이 연락 받고 알았어. 그나저나 너 내일도 일 나가? ‘
“아니, 내일은 쉬는 날인데. ”
‘그럼 만나서 얘기 좀 하자. 다른 애들도 같이. G 카페로 나와라. ‘
“오냐. 내일 보자. ”
다음 날, 그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났다. 어제 동창회에 갔다 왔다던 인진이와 나처럼 연락을 당일 받은 다른 친구들도 와 있었다.
“시성이는? ”
“그게… 말하자면 길어. 커피 시켰냐? ”
“응. 금방 나올거야. ”
“그럼 너 커피 나오면 얘기하자.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 ”
“알았어. ”
막 자리에 앉았을 때, 진동벨이 울리고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빨대를 꼽고 자리에 앉자, 잠깐의 침묵 후에 혁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시성이는 어떻게 된 거야? ”
“걔… 지금 경찰서에 있어… ”
“경찰서? ”
“새끼, 정신 차린 줄 알았더니… 뭐가 어떻게 된 거냐? ”
“걔 어제 나랑 같이 동창회 갔었는데… ”
어제 시성과 인진은 연락을 받고 동창회에 갔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나타났을 때,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와서는 안 될 곳에 온 것 같았다.
“난 그래서 1차만 끝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 녀석 기어이 2차, 3차까지 가더니 일 냈다… ”
“무슨 일? ”
“3차에서 대한이랑 싸움이 붙어서, 대한이를 떡이 되도록 패 버렸어. 경찰서에 있는 이유도 그것때문이야… ”
“…… 새끼, 아직 지가 일진인 줄 아는 모양이지… ”
“휴우…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동창회 연락 못 받았지? SNS로 반 친구들하네 친구 신청하면 거절당하고… ”
“어. ”
그러고보니, 우리들은 전부 동창회 연락을 못 받았었다. 게다가 문자며 전화며 연락이라는 연락은 전부 불가능했고, SNS로 어쩌다 알게 돼 반가운 마음에 친구 신청을 해도 받아주질 않았던 것이다. 어쩌다 친구가 된 녀석들은 바로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홍태한테 들었는데… 전부 졸업하자마자 우리 연락처 수신거부했대. 그 동안 당한 게 많아서 얼굴도 보기 싫다고 일부러 안 부른 건데, 그걸 모르고 서형이가 우리한테 연락을 하게 된 거였단다… ”
“뭐? 그럼 일부러 연락을 안 했다는거야? ”
“어. 그 뿐 아니야… 누가 퍼뜨렸는지, 우리가 이재훈을 괴롭혀서 죽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다 퍼져서… 나 어제 시성이랑 갔는데, 니들이 왜 여기 있냐는 눈으로 노려보더라… ”
이재훈.
1학년때 그 녀석때문에 아주 곤란한 일이 있었다. 그저 그 바닥인 성적 좀 잘 받아보겠다고 컨닝을 했는데, 그걸 선생에게 찔러버리는 바람에 곤혹을 치뤘었다. 아, 그 후로 좀 괴롭히긴 했지만… 그 녀석, 2학년 끝날 무렵에 자살한 걸로 아는데?
“고작 그것때문에 사람을 쓰레기 취급 한대냐? 어이없네, 정말. ”
“고작이 아냐. 누가 찍었는지, 그 영상이며 사진이며 전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홍태가 보여줘서 안 거야… 우리 반은 물론이고 학교 후배며 선배며, 모르는 사람들이 없어. ”
“…… ”
“우리가 걔들을 괴롭혔던 만큼, 우리는 고립당하고 있는 거야… ”
“고립? 하, 말도 안 돼. 그럼 이제 와서 그 새끼한테 사과라도 하러 가자는거냐? 이미 죽었는데 사과는 어떻게 할 건데? ”
나도 갔더라면 그 시선을 감당해야 했을까? 하지만 이미 죽은 녀석이고, 증거 따위 남았을 리가 없는데. 가람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서형이도 예의상 우리한테 연락한 거라고 하던데. 처음엔 몰랐는데, 걔도 애들한테 듣고 알았대. ”
“진짜 돌아가면서 사과라도 해야 할 판이네. ”
“…어떻게 보면 당연한거겠지… ”
순호가 창 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와 동시에 창 밖을 본 가람은, 낯선 여자를 발견했다. 하늘거리는 흰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 역시, 가람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저 여자는…? ‘
하지만 이내 낯선 여자는 사라졌다.
‘내가 헛것을 본 모양이군… ‘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가람은 인진의 연락을 받았다. 시성이 아무래도 그냥 풀려나오긴 힘든 모양이라는 연락을…
‘짜식, 아무리 그래도 거기서 난동을 부리냐… ‘
이제 정신 차렸다던 녀석이 가서 사고나 치고 있을 줄이야… 가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달라진 게 없구만, 이 자식.
“어, 홍태야. 나 가람이다. ”
‘…뭐야,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 ‘
“인진이한테서 알았어. 요즘 어떻게 지내냐? ”
‘뭐, 대학생 생활이 다 그렇지… ‘
“그래도 부럽네, 대학생이라니… 참, 홍태야.. 어제 시성이 일 말인데…… 어떻게 된 거냐? ”
‘휴우… 너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걔, 3차에서 대한이랑 취해서 말싸움 하다가 술병으로 머리를 내려쳤어. 그래서 니네들은 일부러 부르지 말자고 한 건데… ‘
“…시성이가 저지른 일은 나도 유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가 시키거나 한 건 아냐, 정말이야. 나도 인진이한테서 듣고 알았어. ”
‘…… ‘
“…근데 왜 우리한테는 연락을 안 돌린거야? ”
‘처음에는 너네가 그동안 지겹게 괴롭혀왔던 애들이 반대했어. 그러다가 니네가 재훈이 괴롭혀서 걔 자살한 거 알고 나서는 그냥 부르지 않는 쪽으로 결정한거고… 서형이도 처음엔 몰랐는데, 너네한테 연락 하고 나서 알게 된 거야. ‘
“…… ”
‘지금은 정신 차렸는지 어쨌는지 난 몰라, 그리고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너네거 정신 차렸다고 해서 저지른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특히 너네때문에 죽은 재훈이가 뉘우친다고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
“…… ”
‘재훈이 일 알게 되기 전부터 너네 싫어하는 애들 많았는데… 그래서 다들 수능을 기점으로 핸드폰 바꾸고, 졸업하자마자 너네들 수신 차단했어. 아마 연락 안 되는 애들이 많을거야. ‘
“그런 거였구나… ”
어쩐지 씁쓸했다. 일부러 연락도 안 받고, 일부러 연락을 안 했던거였구나. 그 떄의 우리는 어리석게도, 멋있어 보일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찾았다… 살인자. ”
“!!”
아까 카페에서 봤던 낯선 여자가,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3년 전 일, 기억해? 잘못된 일을 해서 바로잡았을 뿐인 아이를, 괴롭혀서 죽게 만든 너희들을 말이야… ”
“…… 그야 기억은 하지만… 이제와서 돌이킬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
“그 아이를 괴롭혔던 건, 그 아이의 친구가 증거를 남겨둔 거야… 그리고 그 아이 역시,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못 했기 때문에 내 손에 죽었지… 그 아이가 묻더라. 왜 자기 친구는 울면서 죽었는데 너는 웃어야 하냐고. ”
“…… ”
“그 때의 치기로 한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가 이 정도라니, 어때? 당장은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떄가 후회스럽겠지? ”
“매우. …그 때는 왜 그랬을까… ”
“…애석하지만 후회해도 소용 없어. 그 아이도, 그 아이의 친구도… 너를 매우 원망하고 있단다. …사과는 저승에서 하렴. 이승에서 하기엔 너무 늦었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 자는, 이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간섭할 수 없거든. ”
“…… ”
낯선 여자는 그에게 가윗날을 내밀었다.
“이건 단지 벌이니까, 날 원망하지는 마. ”
“…… 난 용서받을 수 있을까… ”
“무간지옥에서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된다면, 그 아이를 만나 사과할 수 있게 될거야. ”
“…… 그런가, 죗값을 치뤄야 하는군… ”
“뭐든지, 죄를 지으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니까. ”
서서히 의식이 흐려진다. 그 때의 괴오로, 지금의 나는 벌을 받고 있구나. 한 떄의 치기로 인해 사람도 잃었고, 친구녀석은 사고를 쳐 교도소에 갈 지도 모른다. …짜식, 여전히 정신 못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구나.
“자, 이걸로 네 친구를 죽인 자에 대한 심판은 끝이야. 그러니 편히 쉬렴. ”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고, 차갑게 식은 남자의 시체를 뒤로 한 채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