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오후 두 시경을 가리키고 있었고, 고키부리 사무실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오전에 연락드렸던… ”
“어서 오세요, 마침 저쪽에서도 왔습니다. ”
도희가 남자를 소파로 안내하자, 소파에 앉아있던 금색 가면을 쓴 사람이 이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고대 무덤의 부장품같은 느낌을 주는 가면은, 표면은 매끈하고 금색으로 칠해진 바탕 위에는 검은 선으로 이목구비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 쪽인가? 자, 일단 여기 앉으시고… ”
남자가 소파에 앉자, 금색 가면을 쓴 사람은 소파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먼저 묻겠는데, 우리 팀의 서비스는 확실하니까, 뒤탈 없이 네 신분을 완벽하게 바꿔줄 수 있어. 대신 우리 팀의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면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지워질거고, 네 친구나 가족들도 더 이상 만나지 못할거야. 그럼에도 정말 우리 팀의 서비스를 이용할거야? ”
“네. 부모님을 저버려야 한다는 건 씁쓸하지만, 분명 이대로 가다간 부모님도 저도 편치 않을겁니다. ”
“부모님이 편치 않을거라고? ”
“사연이 좀 복잡한데… 메모리 씨도 함께 들으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
“그럼 잠깐만. ”
금색 가면을 쓴 남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바꾸자,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에서도 OK했고, 그쪽도 최종적으로 우리의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면 당연히 들어야 하는거지. 어차피 절차상 반드시 해야 하는 거기도 하고… 고키부리 사무실도 그쪽으로는 프로페셔널이라 어느정도는 조사했겠지만, 본인 입으로 본인의 생각을 전해듣기도 해야 하니 무슨 사연인지 남김없이 얘기해 봐요. ”
“아, 네. ”
남자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사촌동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습니다. ”
“사촌동생? ”
“네. 큰고모의 막내딸…이죠. ”
“사촌동생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
“그게… ”
남자와 사촌동생은 네 살 터울이었다. 사촌동생쪽이 네 살 연하로, 명절이나 가족 행사때만 간간이 만나는 정도였다. 그래서 남자에게 그녀는 가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남자는 가족 그 이상의 무언가였던 모양이다.
“어릴적에 제가 좋다고, 커서 저랑 결혼할거라고 했을 때는 그저 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어린애들이 가끔 커서 엄마나 아빠랑 결혼한다고 하는것처럼요. ”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거군요? ”
“네… ”
입시와 군대때문에 한동안 친척집을 찾아가지 못했던 남자는 오랜만에 사촌동생을 만났다. 다른 가족들도 명절이라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 친척들은 그간의 근황을 얘기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방에 있는 국립대학에 입학했고, 군휴학 후 다음 학기에는 복학해 2학년부터 다닐 예정이며 여자친구도 있다는 얘기를 했다. 다른 친척들은 대학 진학을 축하해주거나, 학점은 잘 나오는지를 묻거나 했지만 그 사촌동생 혼자 뚱한 표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이 어디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핸드폰을 몰래 가져다가 여자친구한테 헤어지자는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사랑하자면서 결혼하자는 문자를 보내거나… 집에 불쑥불쑥 찾아와서 제 물건을 몰래 가져가거나, 제 방에서 머물다가 가곤 했답니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얘가 어릴적부터 저를 유난히 따랐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제 속옷을 몰래 가져가려던 걸 몇 번 들켰을 때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한테 했던 연락들… 일본으로 가서 살자던가, 뭐 그런 것들… 전부 큰고모한테 보여줬더니 고모는 아무 말씀 없으셨고 고모부는 대신 사과하면서, 다시는 접근하지 못 하게 하겠다고 했어요. ”
“일본은 왜? 부모님 눈을 피해서 둘이 알콩달콩하게 살자 이런건가? ”
“우리나라는 사촌간 결혼이 금지지만, 일본은 사촌끼리 결혼해도 되거든. ”
“……! ”
“그럼 네가 우리 팀까지 찾아온 건 그 제재가 안 됐다는 얘기겠네? ”
“그런 셈이죠… 팀 반델에 가서 의뢰를 해보라고 권유한 건 큰고모였어요. 거기서 의뢰를 들어주게 되면 지금의 저는 없어지게 되고, 부모님과도 만나지 못하게 될거라는 걸 알면서도… 부모님은 처음에 반대하셨지만, 점점 폭주하는 사촌동생을 말리는 것도 힘들고… 결국 두손두발 다 드셨어요. ”
“…… ”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때,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되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저를 알아보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하나뿐인 엄마의 아들이니까… ”
“슬하에 자식이 너밖에 없었나보구나. ”
“시험관 시술을 여러 번 해서 겨우 제가 태어났다고, 애지중지 키워주셨으니까요. ”
“뭐, 좋아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사연은 여기까지. 리더, 한 사람 더 온다던 건 어떻게 됐어? ”
“그건 기각이야. 선생한테 악성 민원을 넣은 것 때문에 신상정보가 털려서 못 살겠다고 의뢰를 한 모양인데, 사람을 죽였으면 자기도 거기에 걸맞는 짐을 지고 사는 게 맞지 않아? ”
금색 가면을 쓴 남자는 남자를 데리고 아지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메모리는 남자에게 서류 뭉치를 건네며, 곧 임시로 쓸 몸을 받을거라는 얘기를 했다. 남자가 동의서에 서명을 하자, 잠시 후 웃는 얼굴 가면을 쓴 남자와 화려한 가면을 쓴 남자가 왔다.
“아니, 근데 이 몸은 모양을 바꾸기 뭔가 아까운데… ”
“그러게. 사촌동생만 아니었어도… 그래도 의뢰는 의뢰니까. 정 아까우면, 다른 사람인 거 티 나게 살짝만 바꿔. ”
“뭐,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 사촌동생이라는 놈이 알아보고 달려들까봐 그러지. 아차차, 일단 이 쪽을 따라가 봐. ”
“아, 네. ”
화려한 가면을 쓴 남자를 따라간 남자는 진열대에 놓인 인형들을 발견했다. 마치 인형 박물관에 온 것처럼, 인형들이 줄지어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애석하게도, 구체관절 인형은 여자가 많아. 남자 인형도 몇 개 있긴 하지만 이게 전부고… ”
“아뇨, 이 인형이면 됩니다. ”
“뭐, 그럼 됐어. 몸을 옮기고 나면 모델러랑 좀 더 얘기해봐야겠지만, 원판이 너무 아까워서 크게 바꾸지는 않을 것 같아. 대신 사촌동생이 따라오지 못 하게 할 방법을 제로랑 같이 논의해보자고. ”
남자의 혼을 인형에 옮긴 다음, 화려한 가면을 쓴 남자는 남자의 몸을 웃는 가면을 쓴 남자에게 가져갔다. 그리고 웃는 가면을 쓴 남자는 남자의 혼이 담긴 인형을 들고 검은색 가면을 쓴 사람에게 데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음… 그러니까, 원판을 크게 건드리고 싶지는 않고, 사촌동생은 못 달라붙게 해달라? ”
“크게 바꾸기엔 너무 아까워서 말이야. ”
“네 녀석의 철학때문에 내가 죽어나겠구만… 뭐, 그래도 일단 강구는 해 봐야지. 너, 외국어 잘 하는 거 있어? ”
“이탈리어라면 조금 할 줄 아는데… ”
“그럼 됐다. 조금 더 서양인 얼굴형으로 다듬고, 메모리한테 말해서 이태리어 능력은 지우지 말라고 해. 그러면 해결이네. 네 사촌동생이 찾지 못 하게, 네 신변은 확실하게 마무리 해 줄게. ”
남자의 새로운 몸이 완성될 동안, 제로는 남자의 모든 것을 정리했다. 남자의 마지막 SNS에는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올리고, 은행 계좌를 전부 정리했다. 신변을 정리하고, 남자는 메모리에게 새로운 기억을 부여받았다. 그 후, 이전에 사용하던 계좌에 남아있던 돈을 전부 받은 그는 아지트를 나와 이탈리아로 갔다. 이제 그 곳에서, 그는 이탈리안 셰프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전에 부모님이었던 두 사람과는 이탈리아에서 식당 주인과 손님으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한국에 가게 된다면 꼭 한번 찾아뵙겠다는 인사와 함께 헤어지게 되었다.
‘네 사촌동생, 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대로 미쳐버려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었어. 큰고모 내외는 그런 자식은 없는 셈 치겠다고 하셨고… 아마 여생은 미쳐버린 채로 보내게 되지 않을까? -팀 반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