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4. Die Spinnenblume

“저 분이 새로 오신 상무님인데, 이번에 ㅇㅇ우먼 표지를 장식했대! ”
“어머, 정말? 나도 그 기사 봤어! 정말 대단하더라. ”
“S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기업에 바로 합격했다는데, 정말 대단해! ”
“나도 상무님처럼 잘 나가고 싶다… ”

모든 여사원들의 선망의 대상인 아현, 그녀는 일류 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바로 대기업으로 합격한, 그 후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다가 그 경력을 인정받아 작은 회사의 상무로 들어오게 된 커리어 우먼이었다.

그녀처럼 성공한 케이스야 다른 사람들도 많지만, 여성으로서는 꽤 드문 일이었는지 최근에는 여성 잡지에서 그녀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그녀를 달갑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그것은 극소수였다.

“최 팀장, 업무를 이렇게 진행하면 어떻게 해요? 당장 기획서 다시 작성하세요. ”
“네, 상무님… ”
“그리고 박 팀장, 기획서 철자가 틀렸네요? 국어 제대로 배운 거 맞아요? 초등학교부터 다시 다니는 게 어때요? ”
“죄송합니다… ”
“김 부장님, 사원들 교육을 어떻게 하신 거죠? 하나는 기획서가 엉망이고 다른 하나는 오타를 내질 않나… ”
“…… 죄송합니다, 상무님. 제가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
“앞으론 조심해요. ”

그녀가 한 번 휩쓸고 간 자리는 후폭풍이 장난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등쌀에 못 이겨 회사를 나가는 직원들도 많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무실에서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사원의 책상이 비어있더니, 이내 새로운 사원이 들어온다. 이러기를 몇 달이 반복됐다.

“하… 업무보다도 인수인계 매뉴얼을 더 빨리 외우겠어요. ”
“김대리도? 나도 그래… 대기업에서 일하고 왔다더니 완전 깐깐하더라고. 후우… ”
“어떻게 새로 들어오는 애들이 두 달을 못 버티고 나가냐… ”
“솔직히 나같아도 못 버틸 것 같아서 이해가 가긴 하지만… ”

두 중년 남성이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유일하게 상무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은 옥상 뿐, 회사 어디서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를 만날 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남 사원 장례식에는 못 가는거야? ”
“아무래도 잔업이 많아서… 미안해. ”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 ”
“알았어.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회사에서 일했던 사원 하나가 죽었다. 그녀가 그만두기 전에도 김 대리는 남몰래 사무실에서 눈물을 훔치던 그녀를 종종 보곤 했었다. 이내 그녀는 그만뒀고, 며칠 후 부고가 날아왔다. 그래도 회사에 있었던 사원인데, 마지막 가는 길에 배웅 정도는 해 줘야지. 김 대리는 담뱃불을 끄고 사무실로 내려와 일을 마무리했다.

“박 사원, 미안한데 이 일 좀 도와줄 수 있나?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
“아, 걱정 마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
“얼마 전 그만 둔 남 사원 알지? 남 사원이 죽었대. 그래도 우리 회사에 있었던 사람인데, 가는 길에 배웅 정도는 해 줘야지. ”
“저런… 아무튼 알겠습니다. 상무님께는 적당히 둘러댈게요. ”
“고맙네. ”

상무가 새로 온 후로 정시 퇴근이 없어지고, 건물에는 자정이 넘도록 사람이 남아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김 대리네 팀도 그랬다. 정시퇴근이라도 하다가 상무를 만났다간 무슨 꼴을 당할 지 모르니, 다들 조용히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김 대리는 상무를 피해 간신이 남 사원의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유족들과 절을 하고 영정 사진을 바라본다. 처음 회사에 왔을 때의 그 미소가, 사진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불귀의 객이 돼 버린 지금 그 미소는 이제 볼 수 없게 됐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하나밖에 없는 따님인데… 그래도 기운 내세요, 부모님들이라도 얼른 기운 추스르고 일어나야 하늘에 있는 지현 씨가 좋아할겁니다. ”
“감사합니다… ”
“아니, 그런데 다른 사원들은 하나도 안온규? ”
“아, 그게… ”
“아니, 시상에… 적어도 회사에서 3년이 넘게 일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믄, 배웅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규…? 너무하네 그려! ”
“여보, 진정해요… ”

김 대리는 겨우 빠져나왔지만, 다른 사원들은 부고 소식을 듣고 나서도 가지 못 했다. 모두들 그녀의 사망 소식은 안타까워 했지만, 상무가 지키고 서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저, 아버님. 사실은… 최근 회사에 새로운 상무가 들어온 후로 일이 많아져서, 어떤 직책이든 할 것 없이 매우 바쁜 상황입니다. 저만 겨우 시간을 내서 올 수 있었지만, 다른 사원들도 지현 씨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도대체 그 상무, 어떤 사람인지 낯짝 한 번 봅시다! 우리 딸을 이렇게 죽게 만든 그 사람 낯짝 좀 보자고! 아이고 지현아… ”
“여보, 진정해요… ”

지현의 엄마가 남편을 달랠 동안, 김 대리는 육개장을 들이켰다. 사원들이라도 같이 왔으면 술이라도 들이키겠건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음날, 김 대리는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근을 했다.

“박 사원, 어제 잘 들어갔어? ”
“네. 장례식장은 잘 다녀오셨어요? ”
“뭐, 그렇지… 그래도 3년동안 일한 사원인데, 나 혼자 배웅 왔냐고 아버님이 많이 서운해하시더라… ”

3년씩이나 함꼐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죽었는데도 차마 갈 수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상무때문에. 김 대리는 어쩐지 씁쓸했다. 그리고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낯선 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한을 많이 샀는걸… 이대로라면 금방 죽을 지도? ”

하얀 머리를 흩날리며 붉은 눈으로 건물을 응시한 그녀는, 막 출근한 아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회사에서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지, 그리고 지현의 죽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날 저녁, 낯선 여자는 사람들이 없는 빈 사무실에 들어섰다. 몇몇 군데 불이 켜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정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이 빠졌다. 그녀가 향한 곳은 지현이 예전에 일했던, 지금은 박 사원이 일하는 자리였다.

“너는 편히 잠들어도 괜찮아. 그 녀석, 원한을 하도 많이 사서 곧 죽을 운명이거든… 정 여기 더 머물고 싶거든 네 후임이나 잘 보필해라. ”

책상을 손으로 한 번 쓸어보며 몇 마디 중얼거린 그녀는 불 꺼진 캄캄한 복도를 돌아다녔다. 군데군데 불 켜진 방에서는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거나, 사무실 한 켠에서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몰아세워가며 얻는 원한을 대가로, 그녀는 성공한 것일까.

“자아를 억누르고 인격을 짓밟아가면서 성공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

그녀는 곧 상무의 방에 향했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문 앞의 수많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상무실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어서, 그림자들은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괜찮아, 천천히 무너뜨려보자꾸나. ”

다음날, 박 사원이 출근했을 때 옆 팀 사무실은 상무의 카랑카랑한 불호령때문에 시끌시끌했다.

“아, 박 사원. 얼른 앉아, 잘못하면 우리까지 불똥 튀어. ”
“무슨 일이예요? ”
“홈페이지에 이상한 글이 올라왔다고 아침부터 저러잖아. ”
“……? ”

회사 홈페이지에는 누군가 익명으로 올려놓은 글이 있었다. 간밤에 올렸는지 어제는 없었던, ‘백아현 상무의 실체’라는 글이었다.

“쉿, 지금 여기서 열어봤다간 불똥 튄다. 핸드폰으로 주소 보내줄테니까 그걸로 보고, 상무가 이 쪽을 보면 전화 받는 척 해. ”
“네. ”

옆 사원이 보내준 주소를 통해 글을 읽어본 박 사원은 왜 상무가 아침부터 저러는 지 알 것 같았다.

게시글에는 얼마 전 죽은 남 사원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그녀가 죽게 된 경위와, 그녀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백 상무가 일류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던 이유와, 대기업에서 나오게 된 이유까지.

그녀는 오직 성공가도를 위해 달려오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원한 관계가 되었다.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면 가차없이 쳐 내고,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라면 어떤 것이든 하면서 일류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기 위해 기를 썼다. 그 어떤 것에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아니, 지금이라도 말한다면 학교의 위신이 떨어질 정도라고 한다.

대기업에 입사한 후로, 그녀는 끊임없이 승진하며 막힘 없이 나아갔지만 그 뒤에는 많은 사람들의 원한으로 이루어진 발판이 있었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하는 사원들이 있으면 뒤에서 험담하거나 방해하고, 어떻게 해서든 깎아내리려고 기를 썼다. 그녀의 등쌀에 그만 두는 사원들도 있었고, 자살하는 사원도 있었다.

그녀의 이런 성격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았다. 아랫사람이 조금의 티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폭언을 일삼으며, 자신은 정시퇴근을 하더라도 아랫사람들은 전부 야근을 하도록 강요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은 윗사람에게는 갖은 아양과 애교, 뇌물공세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윗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남 사원이 죽게 된 것도 그녀의 시기와 폭언때문이었다. 평소 일을 꼼꼼히 하고 다른 사원들과도 두루 잘 지냈던 그녀를, 아현은 질투하고 있었다. 자기 마음대로 아랫 사람들을 주무르기 좋아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남 사원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남 사원에게만 과중한 업무를 주거나, 전혀 상관 없는 업무를 시켜놓고 실수를 하면 폭언을 하는 등, 여러가지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남 사원은 결국 불귀의 객이 되었다.

“…… 그럼 이 책상의 주인은… ”
“응. 이 책상, 남 사원이 쓰던 책상이야. …며칠 전 김 대리님이 장례식장에 다녀왔다던 그 남 사원 말야. ”
“…… ”

박 사원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 그렇게 죽게 만들었으니 장례식장이고 뭐고 못 가게 했던 거겠지.

“그래서 장례식장도 못 가게 했던 거겠군요. 뭐… 사람은 인격으로 평가받기보단 스펙으로 평가받는 세상이니까요. ”
“…참 안타깝지… 쉿, 저기 상무 온다. ”

아현이 박 사원 쪽을 돌아보자, 박 사원은 얼른 핸드폰을 끄고 컴퓨터로 업무를 하는 척 했다. 다행히도 미리 띄워놓은 사이트 덕분에 그는 불호령을 듣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 날 저녁.
아현은 글을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데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 아현의 방으로 어제의 낯선 여자가 들어왔다.

“넌 누구지? ”
“단죄자. 너를 죽이러 왔어. ”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는데. ”
“원한을 대가로 얻은 성공은 어때? 좋아? 기뻐? 행복하니? 이제 그 대가를 치르러 온 것 뿐이야. ”
“밖에 아무도 없어? 이 여자 끌어내! ”
“나는 네 눈앞에만 보여. 그럼… ”

그녀는 가윗날을 꺼내 상무실의 전등을 깨 버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파열음이 들리더니, 상무실의 불이 꺼졌다. 남은 빛은 그녀의 컴퓨터 모니터에서 새어나오는 빛 뿐이었다.

“!!”

칠흑같은 어둠이 밀려옴과 동시에, 낯선 여자를 중심으로 무언가가 끓는 듯한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보글거리며 무언가가 끓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누군가의 비명 소리와 원망 섞인 한숨 소리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네가 진 원한들, 전부 가져가렴. ”

한숨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의 발 밑으로 그림자가 다가오자, 수많은 손들이 뻗어나와 그녀를 집어삼킬 기세로 기어올라갔다.

“꺄악! ”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아현이 있던 곳에는 컴퓨터만이 남아 있었다.

며칠 후…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님의 뒤를 이어서 일하게 된 박성훈이라고 합니다. 선배님 소식 듣고 못 가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제 고생하셨으니까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제가 선배님 몫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

아현이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회사는 예전으로 돌아왔다. 잔업이 남아서 야근을 하는 사람은 있지만, 억지로 자정까지 남기는 사람도 없었다. 실수를 했다고 폭언을 퍼 붓는 사람도 없었다.

모처럼 시간이 나자, 성훈은 김 대리에게 허락을 얻어 연차를 쓰고, 지현의 유골이 안치된 곳으로 인사를 하러 왔다. 그 동안 고생 많았어요, 선배님. 상무님은 그만 두셨고 회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어요. 앞으로는 제가 선배님 뒤를 이어서 열심히 할 테니까, 선배님은 편히 쉬세요.

-잘 부탁해요, 후배님.

성훈이 가볍게 목례를 마치고 돌아서자, 산들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