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5. 미궁 탈출

-다들 식사 받아.

연인을 잃은 그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던 그는 아침 식사를 알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 앞에 놓여진 식사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남은걸까? ‘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물어본다고 누군가 답해주지도 않을 것 같고, 그런 것에 에너지 낭비 할 시간에 차라리 게임에 집중해서 어떻게든 결승에 가야 한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니까.

아침식사로 들어온 것은 샌드위치였다. 플랫 브레드 안에 두툼한 베이컨과 양상추, 토마토, 아보카도, 피클이 들어가 있었다. 한 입 베어물면, 호스 래디시 특유의 맛이 느껴진다. 음료는 얼음이 가득 들어간 콜라였고, 디저트로는 치즈소스와 함께 나쵸가 왔다.

‘대학원에서 종종 먹곤 했는데… ‘

실험때문에 스케줄이 꼬이기 일쑤였던데다가, 방학중에는 학생식당도 일찍 문을 닫는다. 그런데다가 중간에 나가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후배한테 잠깐 봐달라고 부탁하고 근처 샌드위치 매장에 가서 늘 먹던 대로 사 와서 먹는다. 석사를 마칠때까지는, 그게 그의 루틴이었다.

-다 먹었으면, 다들 준비해.

각 방에서 참가자들이 나왔다. 진행 요원들이 참가자들을 줄세우고 있을 때,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후반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이 없네요. ”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면, 하얗고 아름다운 여자가 보인다. 베일처럼 흩날리는 까만 머리 끝으로 가면, 분홍빛으로 물들어간다. 그 동안 그가 봐왔던 눈과는 다른, 형형색색의 눈이 참가자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까만 옷 위로는 검은 망사로 된 케이프를 걸치고 있었고, 케이프 밑으로는 어깨를 따라 길게 띠 장식이 있었다. 옷에 달린 장식과 케이프에는 역십자 모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부드러워보이는 옷은 허벅지까지 트여있었고, 그 밑으로 까만 스타킹과 까만 구두가 언뜻 보인다. 팔에도 비슷한 재질의 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그녀의 머리에는 까만 역십자 장식과 함께 까만 베일이 쓰여져 있었다.

“앗, 성녀님께서 직접… ”

그녀가 나타나자, 진행 요원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

진행 요원들은 그녀를 ‘나락의 성녀’라고 불렀다. 잘은 모르겠지만, 진행 요원들이 저렇게까지 대할 정도면 계급이 꽤 높은 사람인 듯 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그는 멀리서 그대를 지켜보고 있을것입니다. ”

참가자들을 둘러보던 그녀는, 연인을 잃은 여자의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녀의 위로를 받은 여자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더니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마치 잠에 들 것만 같이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그럼, 건승하시길 빌겠습니다. ”

낯선 여자가 가 버리고 잠시 후, 진행 요원들은 참가자들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반은 빨간색, 반은 검정색인 원판이 있는 손목시계 같은 것이었다. 바늘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원판은 빙빙 돌고 있었다.

“이번 라운드에서는 이게 꼭 필요하니까 가지고 있어. 이게 없으면 제대로 된 진행을 할 수 없으니까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돼. ”

신신당부까지 하면서 무언가를 채운 다음, 진행요원은 참가자들을 위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열두명은 경기장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이번 판데모니움 로열은 특별히 나락의 성녀님께서 제공해주신 미궁 스테이지에서 진행하겠습니다. ”

그가 있는 곳은, 정사각형의 방이었다. 방의 벽에는 까만 문이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 손목에 찼던 단말에 있는 바늘은 빨간색을 가리키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있는 이곳은 바로, 나락의 성녀님께서 특별히 만들어주신 나락의 미궁입니다. 여기서 각 참가자들은 문과 계단을 통해 출구로 나가야 하는데요… 과연 어떤 참가자가 살아서 무사히 출구로 나가게 될까요? ”

밖에서 들여다보면서 방송을 하는 것처럼, 장내 방송이 들렸다. 동시에, 각 참가자들에게도 규칙 안내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번 방 문을 열게 되면, 그 색깔의 방문만을 열어야 해. 미궁의 구조상 절대 특정 색의 문을 선택한다고 해서 갇힐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계단이 있는 방에 도착하게 되면,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이동할 수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탈출은 신중하게 하도록. ”

그의 눈 앞에는 검은색 문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검은색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방으로 이동하면서, 계단이 있는 방을 찾아 움직였다.

‘이 바늘은 뭘 가리키고 있는거지? ‘

동시에 그는, 손목에 찬 단말의 원판이 정상적으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는 채였다. 아직까지는 같은 색의 문을 열어 방 안을 탐색하고, 계단이 있는 방을 찾는 게 목표였다.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가 최상층인가? ‘

층에 대한 정보도 모르는 채로, 그는 계단을 찾고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헷갈리지 않게끔 하기 위해, 지나온 방의 문을 열어둔 채로 움직였고 계단이 있는 방에 도달했다. 계단에는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간 다음, 또 다시 문을 열고 계단이 있는 방을 찾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손목에 있는 단말을 보니, 어느새 원판이 돌아서 바늘은 검정색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루의 끝이 되었습니다. 참가자 분들께서는 지금 머물고 있는 공간에서 잠시 휴식을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디선가 안내 방송이 울렸다. 그리고 눈앞에 쿠키와 차가 나타났다. 순간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경계했지만, 잠시 휴식을 해 달라고 했던 걸 보면 먹어도 되는거겠지, 그는 쿠키를 한 입 베어물었다.

‘이게 뭐지? ‘

쿠키 속에 숨겨진 쪽지를 발견한 그는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쪽지에는 ‘아래’라고 쓰여있었다. ‘아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배도 적당히 채워진 것 같으니 움직이기로 했다.

아래로 가는 계단을 또 다시 찾은 그는, 계단을 내려가 다른 계단이 있는 방을 향해 움직였다. 여전히 쪽지에 적힌 말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아마도 출구의 위치가 더 아래라는 얘기겠거니, 생각한 그는 또 다시 하루가 끝날떄까지 최대한 아래로 내려가기로 했다.

‘두 층정도 내려왔나…? ‘

내려오면서 그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차원에 있나? 그것도 아니라면 전부 다른 방에 있나? 그럴 리가 없다. 문 색깔이 두 개이고 한 가지 색깔만 통과한다고 해도, 적어도 한 번은 마주치게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그럴 일이 없었다. 미궁은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매우 적막한 공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설마… 다 죽었다거나… 아니겠지? 아닐거야… ‘

간식으로 온 쿠키 속 쪽지에는, 점 하나만 찍혀있을 뿐 아무 글자도 쓰여있지 않았다. 그 층에서 계단이 있는 방을 찾긴 했지만 위로 올라가는 계단만 있었다. 간식으로 온 쿠키를 다 비우고 움직인 그는, ‘출구’라고 쓰여진 팻말이 붙어있는 문을 발견했다. 드디어 출구를 찾았다고 생각한 그가 문을 막 열려던 찰나.

‘탈출은 신중하게 하도록. ‘

마지막에 규칙을 설명하고 끝맻은 말이 떠올랐다. 탈출은 신중하게, 무슨 말일까? 손목에 찬 단말과 뭔가 관련되는 거라도 있나? 이 단말이 한바퀴 돌고 나면, 하루의 끝이라고 하면서 쿠키가 나왔다. 그렇다면 이게 낮과 밤인가? 출구를 앞에 두고 그는 여러가지 생각에 빠졌다.

몇 명이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섣불리 나갔다가 죽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의 특성상, 그런 사람이 없을 수가 없다. 분명 몇 명은 죽었을 것이고, 그게 탈출은 신중하게 하라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참동안 생각한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숨겨둔 규칙이 있다면, 이 단말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했다면, 그리고 탈출은 신중하게 하라고 했다면 아마도 이 단말과 뭔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검정색을 가리키고 있으니까, 지금 나가자.

-끼익

그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진행 요원이 있었다.

“축하해, 다섯 번째로 이 방에 들어왔고 세 번째로 탈출하게 됐어. ”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급받은 단말을 반납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 진행 요원은 다섯명 중 두 명은 숨겨진 규칙을 몰라 죽었다고 했다. 그 숨겨진 규칙이라는 건, 단말의 바늘이 가리키는 색과 출구로 가는 문의 색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 먼저 나간 두 명 중 한 명은 타이밍이 좋아서 색깔이 일치했고, 다른 한 명은 앞서 들어갔던 한 명이 색깔 불일치로 죽는 것을 본 후 들어와서 살았다고 했다.

전부 탈출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비밀이라며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어렴풋이 죽게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끝으로, 그는 미궁을 나오기 전에 연인을 잃었던 여자에 대해 물었고 진행 요원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끝으로 그를 미궁 바깥으로 내보냈다.

“아까 다섯명 중 두 명이 죽었다고 했지? 그 여자도 죽은 사람 중 하나야. 남자친구가 탈락해서 죽은 시점에서, 살 의지는 없었던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정말 규칙을 모르고 무작정 들어온건지, 규칙을 알면서도 남자친구를 따라가려고 일부러 틀리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