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기업은 반도체 업계에서도 1위를 달리며, 반도체 뿐 아니라 스크린 기술도 뛰어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핸드폰 기업인 C사에서 K 기업의 액정을 공급받아 기기를 출시할 정도였다. 과학상상화 같은 곳에서 보던, 마치 두루마리를 말듯 둘둘 말 수 있는 스크린이나 접을 수 있는 스크린은 물론 동전보다도 얇은 TV가 출시될 정도였다. 규모도 굉장히 큰 대기업이고, 위상도 어마어마하다보니 반도체를 전공하는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교수님들도 전 학기 A0 이상을 받은 학생이나 대학원을 수료한 학생들은 이 곳에 원서를 쓰도록 추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보면 밖에서 알려진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부서와 달리, 연구실에서 사내정치를 일삼는 김 부장때문에 아랫사람들은 죽어나갈 정도였다. 성에 안 차면 서류로 뺨이나 머리를 가격하거나 클립보드로 몸을 꾹꾹 찔러가면서 폭언을 날리는데다가, 여직원들만 봤다 하면 딸 같아서 그런다며 자기 딸한테도 못 할 말로 성추행을 했다. 그럼에도 김 부장이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것은, 그의 빽이라고 할 수 있는 최 의원 때문이었다.
굴지의 대기업이 안에서 썩어갈 무렵, 기업 내부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윗사람이 바뀐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고키부리 사무실에 찾아와서 한 하나의 의뢰 때문이었다. 의뢰를 하러 찾아온 것은 3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으로, 수더분한 머리에 낡고 무거워보이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는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었고 지금은 세상을 떴으며, 세상을 뜬 것은 최 의원과 그 옆에 타고 있던 김 부장때문이라고 했다. 최 의원과 김 부장 둘 다 음주운전을 했고, 만취 상태에서 역주행을 하던 그들의 차를 피하려던 그녀의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그들은 합의금조로 300만원을 주겠다고 했으나 가족들은 거절했다. 그러자 합의금을 받을떄까지 무언의 협박 전화가 이어지고, 험상궂은 사람들이 집 근처에 보였다. 집을 옮겨도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은 찾아왔다. 그녀가 다니는 직장이나 남동생이 다니는 학교, 어머니가 다니는 공장에까지 찾아와서 그들은 협박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일했어요. 휴일이고 평일이고,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어깨도 성치 않은 몸으로 일했다고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의 인생을… 우리 가족들의 인생을 망쳐놓고 고작 300만원이요? 우리 가족들의 인생은 300만원짜리 인생인가요?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온 인생의 값어치가 300만원밖에 되지 않는건가요? “
“인간의 인생에는 가치를 매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의 인생이야말로 300만원어치이기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보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혹시 협박당한 증거는 있나요? 사진이나 음성메시지를 녹음한 것 말이예요. “
“증거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 없었어요… 물리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다고만 하고… “
“알겠습니다. 그들에게도 인생의 가치를 가르쳐주도록 하죠. “
그렇게 현수는 K 기업 연구실에 취직하게 되었다. 얼굴도 반반한데다 스펙도 뛰어난 현수를 김 부장은 아니꼽게 봤지만, 일처리도 완벽한데다가 다른 직원들과도 원만한 관계였던 현수를 그는 섣불리 괴롭히지 못 했다. 그저 다른 직원이나 더 면박주고, 법인카드로 개인 물품이나 넙죽넙죽 사대고 얼렁뚱땅 넘기는 것이 김부장이 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최 의원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최 의원은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였다. 김 부장이 동승자로서 음주운전을 말리지 않은 잘못이 있었다면, 최 의원은 직접 운전대를 잡고 한 사람을 죽게 만든 죄가 있었다. 쉬쉬하실 바랬지만 이미 기사도 떴고, 최대한 빨리 해결하려고 합의금을 쥐어주려고 했지만 피해자 가족들은 합의금을 받지 않았다.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가장의 인생이 고작 300만원밖에 되지 않느냐는 터무니없는 질문도 함께였다.
“아이고~ 의원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사건은 어떻게… 해결 좀 보셨습니까? “
“원체 합의금을 받질 않으니 억지로라도 쥐어주려는데, 잘 안되네요. 한 사람의 인생이 고작 300만원이라니, 그것도 많이 쳐 준건데 말이죠… “
“정 안 되면, 합의금을 받고 입 다무는 대가로 저희 회사에 꽂아준다고 해 보시죠. 죽은 사람 아들내미가 공대생이라고 하니 아마 100% 응해줄겁니다. “
“하지만, 그랬다가 다른 빌미를 만들어주는 건 아니겠죠? “
“해결되면, 우리도 입 씻으면 그만 아닙니까. “
“호오…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
두 사람은 어떻게든 피해자가 입을 닫게 하기 위해, 피해자의 아들을 찾아가 회유했다. 그 때, 회유당할 뻔 한 아들을 구한 것이 도희였다. 도희는 두 사람의 속내를 알고 있었기에 역으로 당신들이 그렇게 말해놓고 입 싹 씻어버리면 그만 아니냐며, 정말 회유 목적이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각서 써서 변호사에게 공증을 받아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생각지도 못 한 역공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못 했다. 도희는 피해자의 남동생에게 앞으로 저 사람들이 찾아오거든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네주고 가 버렸다.
“별 맹랑한 여자 다 보겠네… “
“이거이거, 일이 쉽지 않겠네요… “
현동은 피해자의 집에 찾아가 주변을 서성이는 수상한 사람들을 찾아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을 불러낸 현동은, 이 일의 배후를 알고 있다며 그 사람의 성격상 당신들도 적당히 이용한 다음 합의금만 받아내면 홀랑 토해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받기로 한 돈의 두 배를 줄테니 자신들과 손을 잡자고 구슬렸다. 처음에 그들은 믿지 않았지만, 현동은 지금까지 당신들 말고도 토사구팽당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며, 최 의원이 일부러 더러운 일을 시키는 것은 당신들도 떳떳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이의제기를 못 하기 떄문이라는 말로 그들을 설득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으니까 너희들을 대신 시키는 것에 불과하고, 목적을 달성하면 어차피 너희들의 뒤는 봐 줄 필요 없으니 버릴것이라는 말이 그들에게 와닿았던 모양인지, 그들은 동요했다.
그들은 피해자의 가족 주변을 얼쩡거리긴 했지만, 별다른 협박은 하지 않고 그냥 일을 하는 척만 했다. 최 의원이 근처를 지나갈때만 눈치채지 못 하게, 협박하는 척을 할 뿐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로는, 최 의원이 선급급으로 지급하기로 한 것도 주지 않았고 차일피일 미루어왔다고 했다. 어떻게든 합의금만 받아내면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해주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대가조차 지불하지 않은, 그리고 지불할 생각조차 없었던 셈이었다.
“그나저나 의원님, 요즘 회사에 신입사원 하나가 들어왔는데… “
“아, 그래요? 새로 온 친구는 좀 어떻던가요? “
“일은 신입사원 치고 퍽 잘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말이지요… “
“김부장, 그래도 회사에서 꼬장은 적당히 부리시는 게 좋을겁니다. 사장이며 상무며 벼르고 있다고 하던데 괜찮은겁니까? “
“의원님이라는 빽이 있는데, 뭘 어쩌겠습니까? “
두 사람은 서로를 빽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그 말은, 둘 중 한 쪽만 무너뜨려도 둘 다 무너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메일을 체크하던 김 부장은 한 메일을 읽었다. 발신인은 린다 장이었고, 중국에 있는 A 기업의 상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린다는 메일을 통해, 이번에 새로 기업체에서 부설 연구소를 차리게 되었고 반도체 관련 분야를 연구하게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신생 연구소를 이끌어나갈 부장급 직원이 필요하다면서, 만약 우리 회사로 이직하겠다면 연봉을 두 배로 쳐주고 비자와 주거지 문제 등도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직원들 중에는 회사 옆 사옥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당신도 이 곳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면서 보낸 사옥의 내부 사진은, 못해도 몇십억은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고급 아파트의 내부보다도 더 고급스러웠다.
두 배의 연봉, 거기다가 고급 아파트를 사옥으로 제공해준다는 말에 김 부장은 혹했다. 그리고 린다 장에게 이직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린다 장은 그와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고 답장을 보냈고,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실상 형식적인 면접이니까 편하게 입고 오라는 말과 함꼐 안내해 준 약도는, 도심부에 있는 한 건물이었다. 김 부장이 메일로 안내받은 건물로 가자, 빈 사무실들만이 보였다. 그 중 한 곳으로 가 벨을 누르자, 말숙하게 입은 젊은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린다 장을 만나러 왔다는 그의 말에 김 부장을 안내했다. 젊은 여자의 안내와 함께 만난 린다 장은, 웬만한 재력으로는 백화점에서 구경밖에 못 할 법한 비싼 브랜드의 옷과 가방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숏컷으로 자른 여자였다.
“이런 곳에서 면접을 보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직 한국에는 지사가 없다보니 부득이하게 친구의 사무실을 잠깐 빌렸습니다. “
“허허, 아닙니다. “
“어차피 형식적인 면접이니까, 별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K 기업 연구소에서 부장급으로 계실 정도면 저희 회사에는 더할나위 없는 인재나 마찬가지니까요. “
린다 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김 부장은 사직 의사를 밝혔다. 형식적으로라도 붙잡을 줄 알았지만, 윗사람들은 오히려 김 부장이 나가기라도 바란듯했다. 그만두는 이유도 묻지 않고, 알겠다고만 했다. 김 부장은 두 배의 연봉, 그리고 고급스러운 사옥에 눈이 멀어 그런것은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공석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얼추 인수인계 준비만 하면서, 안그래도 사무실에서 노느라 앉아있었던 김 부장은 더더욱 할 일이 없어졌다. 공연히 다른 직원들 일하는 데 둘러보거나, 최 의원을 만나러 가는 게 전부였다.
“의원님, 저 사표 냈습니다. “
“사표요?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
“허허, 이직 제의가 들어왔지 뭡니까. 중국 굴지의 A 기업이라는데, 본사에 연구실을 만들게 되어서 관리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연봉도 두 배로 쳐준다고 하고, 비자나 사옥 문제도 해결해준다기에 OK했습니다. “
“분명 좋은 조건이긴 합니다만… 중국이라… 뭔가 걸리는 게 있네요… 연봉이나 다른 대우는 확실하게 해 준다고 하던가요? “
“그럼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별 일 없을겁니다. 국회의원과 연줄이 닿아있는 사람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던 김 부장과 달리 최 의원은 아직도 일이 풀리지 않았다, 합의도 받아주지 않고, 합의금도 받아주지 않는데다가 요즘 협박하라고 보낸 사람들도 건성으로 일하는 것 같았다. 의원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좌불안석이었다. 일은 잘 하고 있나, 그놈들 꽤 독하구만. 김 부장은 중국으로 뜰 수나 있지, 나는 국회의원이라 어디 가지도 못 하는데.
“최기석 의원, 뉴스는 봤어. “
“왜, 무슨 뉴스? “
“회기석 의원, 이번에 음주운전으로 사람 하나 죽였다며? “
“음주운전 엄벌하자고 법안까지 세워놓고, 법안을 세워 놓은 의원이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다니… 최 의원같은 분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고깝게 본다구요. 거기다가 피해자 가족에게 합의금을 받으라고 협박까지 하셨다면서요? “
“!!”
최 의원이 음주운전을 했고, 사고를 냈고, 피해자에게 입을 다물게 하려고 협박까지 했다는 사실이 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사건의 수사 기록도 있겠다, 피해자를 협박하던 사람들이 자백한 것과 피해자들의 증거까지 모은 도희가 기자에게 제보했던 것이다. 피해자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한 기자는 혀를 내둘렀다. 기사의 말미에 있는,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에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말은, 최 의원을 두고 하는 말이었나보다. 자신이 법안을 발의해놓고 자신이 어기다니.
최 의원이 속한 정당에서도 난리가 났다. 당장 다음 경선 후보로 또 나갈 예정이었는데, 시민을 위해 열심히 뛰겠다고 공언한 의원이 시민을 죽이고, 협박했다. 이런 사람이 경선 후보로 나갔다가는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일이 반드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 뻔했고, 부처 장관이나 차관으로 임명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은 청문회에서 누군가는 100% 물어볼 법한 사건이었다. 다른 정당에서는 최 의원의 국회의원 자격 여부를 놓고 제명해야 한다며 이의제기가 들어왔고, 이대로라면 최 의원은 직위를 상실할 처지였다.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김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최 의원의 자격 여부를 놓고 이의제기가 들어갔다는 기사가 나오자, K 그룹 상무는 김 부장을 조용히 불러 지금까지 김 부장이 잘못한 일들에 대해 소송을 걸 것이라는 말과 함께, 회사에서 사고 치지 않고 나가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앞으로는 변호사를 통해서 연락하게 될 거라는 말도 같이 전했다. 그는 연구소 퇴직자 중, 김 부장떄문에 퇴직한 사람들을 몰래 불러서 김 부장이 잘못한 모든 일의 증거와 증인을 모아왔다. 거기다가 김 부장의 빽이나 다름 없었던 최 의원도 실각할 처지이니 김 부장을 신경써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중국으로 떠 버리면 그만이지. ‘
중국으로 떠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상당히 안일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날벼락이 떨어졌다. 모든 준비도 회사측이 해 줄테니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던 찰나, 돌연 린다 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K 기업에서 재직하면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며, 법인 카드로 횡령한데다가 직원들에게 폭언, 폭행은 기본이고 성추행까지 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했다. 상무가 제보했나? 하지만 상무는 그가 어디로 나가는 지 몰랐다. 그 상황에서 그에게 찔렀다고 한다면, 최 의원 말고는 없었다. 린다 장은, 이런 사람을 부설 연구소로 들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이직 제의는 취소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연봉 두 배의 꿈도 날아갔고, 회사에서는 사표 수리를 취소해 줄 생각도 없었다. 당장 김 부장의 후임이 다음날부터 출근이었다. 최 의원에게 따져 물어보려고 했지만, 기사가 뜬 걸 보면 최 의원쪽도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아보였다. 중국 기업으로 이직하려다 취소되었다는 얘기가 아느 새 퍼져나간 모양인지, 그를 받아주겠다는 회사도 없어서 이직을 할 수도 없었다. 중국 기업에 이직했다는 얘기가 없었어도, 아마 그의 인상떄문에 학을 뗴고 나간 사람이 많아서 이직은 불가능했겠지만.
최 의원은 직위 상실 처분을 받아서, 더 이상 의원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그저 전 국회의원 최기석만이 남아있었다. 법조계 쪽으로나마 가고 싶었지만, 음주운전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법안을 발의해놓고 음주운전을 저지른데다 피해자 협박까지 한 사람을 받아줄 로펌은 없었다. 한 순간의 실수가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날것이라고, 그는 전혀 상상하지 못 했다.
“김현남씨…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
그는 피해자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갔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받아줄까,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죽은 자의 가족도 말이 없었다. 아니, 죽은 자의 가족들은 그와 상종하고 싶지 않아했다. 그저 이렇게라도 용서를 빌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것이 그의 위안거리였다.
“피해자를 협박해서까지 입다물러고 했던 주제에 이제와서 용서를 비는 꼴이란… “
“!!”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여자가 서 있었다.
“넌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한 사람이… 아니, 한 가장이 가족들을 먹이고자 했던 노력들이 고작 300만원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던거야? 그 사람이 딸린 자식들을 위해 너같은 인간에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 댓가로, 인생의 값어치를 300만원으로 매겨준거네? 300만원도 헐값 아니니까 이거나 받고 입 다물라고 협박까지 해주고? “
“…… “
“피해자를 협박까지 해 놓고 무사히 넘어갈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애초에 그렇게 다른 인간들을 이용하고 버려버리기를 반복한다면, 네 인생의 가치는 마이너스가 될 테니까. …사실 이미 마이너스긴 하지만. “
낯선 여자는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내 인생의 가치가 마이너스라고? 하지만 난 이미 이룩해둔 것들이 많았다.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내 인생의 가치는 몇억까지도 뛰었을텐데, 무슨 말을 하는거지? 그가 반문했지만 그녀는 이미 네 인생의 가치는 마이너스라고만 답했다. 그리고 너와 함께 어울려 다니는 김 부장이라는 자의 인생보다는 낫지 않냐며, 그 사람은 원한을 하도 사서 인생의 가치가 사채를 쓴 인간보다도 못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최 의원과 김 부장의 사후 목적지는 판데모니움이며, 지금까지 인생의 가치를 마이너스로 만들었으니 그 빚은 사후에 갚아야 한다는 말을 전하고 가 버렸다. 꿈이겠거니 생각한 그는, 집에 와서 씻으려고 옷을 벗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문양이, 마치 타투라도 한 것처럼 왼쪽 가슴팍에 새겨져 있었다. 이는 김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여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얺았지만, 최 의원에게 했던 얘기와 같은 얘기를 하고 왼쪽 가슴팍에 이상한 문양을 새기고 사라졌다.
김 부장쪽도 상황이 좋지 않기로는 마찬가지였지만, 최 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직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고 청소부 일이나 일용직을 해야 할 팔자였다. 하지만 평생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한번에 해 낼 리는 없었다. 가족들은 그들을 힐난했다. 갑자기 가난해진 환경도 환경이었지만, 가종들을 더 힘들게 했던 건 사람들의 손가락질이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는 힐난, 고단해진 몸, 어느쪽이든 견디기는 힘들었다.
“인생의 가치라… 인생의 가치는 뭘로 정해지는걸까요? “
“글쎼요, 저는 인간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단순히 이룬 업적만으로 매겨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나 생전에 쌓아온 덕도 어느정도는 중요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