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VIII. Cryogenic curse

“손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

겨울 아침에 막 주문한 따뜻한 아메리카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는 집기만 해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 질 정도였다. 따뜻하다못해 뜨거워서 집기 힘든 컵에 홀더를 끼우면 딱 좋게 따끈따끈해진다. 그리고 그가 쟁반 위에 올려진 커피에 손을 뻗는 순간…

“!!”

그의 손끝이 닿은 부분부터 커피가 빠른 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분명 그가 잡은 커피는 방금 막 내인 원두와 따뜻한 물을 적당히 섞은 아메리카노가 맞다. 그와 같이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 친구는 커피가 뜨거운지, 컵을 잡기가 무섭게 손을 귀로 가져간다. 그리고 이내 홀더를 끼운 다음에야 따뜻한 지,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닿은 커피는 같은 날 같은 시에 만들었음에도 얼어붙어버린 것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커피는 빨대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얼어붙어버렸다.

“이건 대체… ”

커피 뿐 아니라, 그가 잡는 것은 뭐가 됐든 얼어붙어버렸다. 그러니까, 커피나 물과 같은 액체 뿐 아니라 상추나 양배추같은 야채도 얼어붙었다. 얼어붙을 리 없는 고체에는 표면에 성에가 끼어서, 핸드폰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먹으려고 하는 음식물은 물론 수저도 얼어붙어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그나마, 손이 아닌 입이 닿는 것까지 얼어붙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나마 입으로 닿는 건 얼어붙진 않아서 다행이군. ‘

하지만 생각보다, 닿는 것이 얼어붙는다는 건 불편하다. 뭔가를 만지는 것은 물론 집는 것조차 되지 않는다. 그것은, 손을 아예 못 쓴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는 지금처럼 만지기만 하면 얼어붙는 손을 어떻게 하는 것 보다도 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건지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어라,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런 저주를 받은 거냐? ”
“…네? ”

그런 그와 우연히 지나쳐 가던 은빛 머리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현대인의 복색은 아닌 듯 하면서도 현대인과 같은 옷, 하지만 그의 머리 양 쪽에는 은색의 동물 귀가 달려있었다. 눈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한눈에 그가 남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그를 보자마자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대체 무슨 저주를 받은 거냐는 말을.

“너, 물건이든 먹을거든 손으로 만지면 얼어붙지? 그것도 양손 다. ”
“어떻게 아셨어요? ”
“나는 그런 게 보이니까.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있는 무고한 생명이라도 죽인 거야? ”
“모르겠어요… ”
“뭐,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일단 나랑 같이 가자. ”

그는 은색 머리 남자의 손에 이끌려 괴담수사대에 도착했다.

“나 왔다. ”
“이 녀석,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만… 저건 또 어디서 달고 온 거야? ”

두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안에서 TV를 보던 여자가 쏘아붙였다.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뚱한 표정의 여자였다. 그는 은빛 머리의 남자를 키츠네라고 불렀다. 그녀는 남자를 보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런 저주를 받은 거냐? ”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지만… 애시는 어디 갔어? ”
“미기야한테 같이 좀 오라고 했어. 어휴, 장산 범에 저주받은 녀석까지… 참… 괴이사냥꾼 답구만… ”

곧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감색 코트 안에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책상에 앉으려다가, 키츠네와 함께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애시는? ”
“저기 오네요. 그런데 무슨 일이예요? ”
“아아, 이 사람 말인데… ”
“어머, 이 사람 엄청난 저주를 받았는걸… ”

남자와 달리 뒤이어 들어온 은빛 머리의 여자는, 단번에 그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그것이 ‘저주’라는 것 역시.

“너, 손 못 쓰지. 뭐 만지면 다 얼어붙고. ”
“네, 맞아요.. ”
“크리오제닉. 뭐가 됐든 그 저주를 받은 신체가 닿는 것은 전부 얼어붙어버리고 마는 저주지… 이런 저주를 내릴 만한 녀석은 얼마 돼지 않아. ”
“어떻게 안 될까? ”
“일단 나는 저주 자체를 먹어치울 수 없어. 그리고 이 저주를 건 녀석은 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녀석이야… ”
“그럼 이건 괴이가 건 저주가 아닌 건가요? ”
“괴이는 저주를 걸 수 없어.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걸 만한 녀석은 딱 하나야. 바로 이클립스라는 녀석이지… 하지만 난 그 녀석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 녀석은 괴이가 아닌 다른 존재인데다가, 애초에 일부는 이 곳에 있지만 본거지는 허수 차원이러 어떻게 해도 먹어치울 수가 없거든. 지금으로서는, 그 녀석을 최대한 달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어… ”

지금까지 어떠한 녀석과 마주치더라도, 존재를 먹어치우면 잊혀지기때문에 수많은 존재들이 공포에 떨었었다. 하지만, 그를 저주한 것은 그런 그녀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는 건, 어떻게든 그 녀석을 달래거나 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애기였다.

“놀러 왔… 어라, 손님이 있었군. 게다가 아주 대단한 녀석인걸? ”
“어라, 에키드나 씨. ”
“크리오제닉이라니, 잘도 이런 저주를 받았네. 뭐, 내 동족을 죽인 건 잘못한 게 맞지만… 그게 이 정도 저주까지 내릴 일인가…… ”
“그게 무슨 말이예요…? ”
“너, 뱀 죽인 적 있지? ”
“!!”

사무실 문이 열리고, 에키드나가 들어왔다. 그녀 역시 그에게 저주가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더해서, 그가 왜 그런 저주를 받게 됐는지 까지 알고 있었다. 흠칫 놀라는 그를 본 에키드나는, 역시 그랬다는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뱀을 죽인 것 만으로 이클립스가 그런 저주를 내릴 녀석은 아니야. 그 녀석은 오히려 이 세계의 생명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우리같은 존재들과는 그나마 우호적이지만. 니가 이런 저주를 받은 건, 아마도 그 뱀과 이클립스가 뭔가 연관이 있었을 확률이 커. ”
“예를 들자면요…? ”
“그녀가 아는 존재를 상징하는 뱀이라던가. …그 뱀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 나? ”
“백사였어요. 하얀 뱀… ”
“그럼 그 뱀은 널 공격하려고 했어? ”
“아뇨. 가만히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제가 앉아서 쉬던 곳 근처여서 내쫓는다는 게… ”
“하얀 뱀인데다가 그냥 뙤리 틀고 있는데 죽였다면…… 그럼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군.. 하얀 뱀이 상징하는 녀석이야 많지만, 우리같은 존재들 중 하얀 뱀으로 대표되는 것은 없어. 토지신이나 된다면 모를까… ”

-네녀석, 예까지 오다니…

난데없이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차가우면서도 얇게 날이 선 듯한 목소리는, 마치 공간을 감쌀 기세였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바닥에서 낯선 여자가 튀어나왔다. 머리에 짙은 자수정을 연상시키는 뿔이 두 쌍이나 돋아 있는, 밤처럼 까만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의 눈은 선혈처럼 붉은 호수에 파문이 이는 것만 같았다. 좌중을 한 번 둘러 본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클립스? ”
“흐-음. 이 녀석, 제법이네. 예까지 오다니… 근데 어쩌지? 난 그 저주, 풀어 줄 생각이 없어. ”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무릎 아래는, 까만 늪에 빠지기라도 할 듯 천천히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마치 웅덩이처럼,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나마, 이클립스를 보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은 애시와 에키드나 뿐, 다른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마도, 허수 차원에 있다는 건 지금 녹아있는 그녀의 하반신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어머, 그렇게 사색이 될 필요는 없어. ”
“당신, 도대체 이 녀석이 죽인 뱀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야? 당신은 이 세계의 생물체는 좋아하지도 않잖아. ”
“뭐, 확실히 이 세계의 생물체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그 뱀은 아이를 가진 뱀이었다고. 거처를 찾아 가던 중에 지쳐서 쉬던 걸, 이 녀석이 죽인 거지. 단지 자신이 쉬고 있는 근처에서 쉬고 있었다는 이유, 그리고 뱀이 싫다는 이유로. ”
“아이를… 가져요? ”
“그래. 그 아이, 뱃속에 알이 있었어. 아직 해산할 때는 아닌 듯 했지만… ”
“…… ”

에키드나는 이클립스의 얘기를 듣고 할 말을 잃었다.

“허수 차원에 집어넣으려던 걸 간신히 참은 것 뿐이야. 저주를 풀어 줄 생각은 없어. ”
“그런데 이클립스 씨, 이렇게 해서는 속죄조차 할 수 없겠는걸요… 적어도 속죄 할 기회 정도는 주시는 게 어떨까요? ”
“싫어. ”

그녀는 완강한 태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닿기만 해도 얼어붙어버리는 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야 하다니, 그 역시 절망했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 와중에, 키츠네가 좋은 묘책이 있는지 짝, 박수를 쳤다.

“좋아, 그럼 거래를 하지. ”
“거래? ”
“그래. 그 뱀이 배고 있었던 알은 몇 개야? ”
“일곱 개. …이젠 죽었지만. ”
“좋아. 여기는 괴담수사대야. 여러가지 연유로 사람들이 의뢰를 하러 오곤 하지…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원한을 해결하기도 하고 그럼으로서 사람들을 구해줄 때도 있단 말이지… 어찌됐건 그건 생명을 ‘구하는’ 일이잖아? ”
“음… 그래서, 논지가 뭐야? ”
“그 뱀의 몫과 뱀이 배고 있었던 알의 몫까지 총 여덟 번. 너도 알겠지만, 생명의 가치는 다른 생명으로만 매겨지지…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손은 쓸 수 있을 정도로만 저주를 풀어주고, 이 녀석이 우리와 같이 일하면서 여덟 생명을 구하거나 원한을 풀어주게 되면 저주를 완전히 풀어주는거야. ”
“여덟 생멍…? ”
“그래. 사람이건 동물이건, 딱 여덟. ”

이클립스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죽은 뱀과 그 뱀이 배고 있던 알까지 여덟 몫의 생명을 구하거나 원한을 풀어 준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녀가 걸었던 저주는 풀어주게 된다.

“좋아. 하지만 조건이 있어. ”
“뭔데? ”
“죽은 뱀도, 그 아이도 동물이니 동물의 생명으로 여덟. ”
“음… 좋아. 이봐, 너도 동의하지? ”
“…그럼 죽을 뻔한 동물을 여덟 마리 구해주면 되는건가요? ”
“그래. …좋아, 저주는 약화돼서 닿는 것 만으로 얼어붙지는 않을거야. 그럼, 나중에 또 보지. ”

그녀는 바닥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그래도 말은 통하니 다행이네요… ”
“…여기서 동물의 생명도 구해주나요…? ”
“가끔, 그럴 때는 있죠. 동물의 원한을 풀어준다던가 할 때도 있는걸요… 드물긴 하지만. ”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
“이제 다시 한번 만져보실래요? ”

그는 손을 뻗어 물잔을 만졌다. 이전과 달리 손이 닿자마자 얼어붙는 일은 없었다.

“다행이네요… ”
“좋아, 이제 그 냉기를 어떻게든 할 수 있게끔 도와줄게. 아마 닿는 것 만으로 얼지는 않겠지만, 오랫동안 잡고 있던가 하면 얼어붙긴 할거야. 사실 깨어 있을 때는 상관 없지만, 잠들어 있을 때 그렇게 되면 곤란하거든. 잠깐만. ”

에키드나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은 다음, 남자에게 건넸다.

“이걸 꼭 가지고 다녀. 적어도 잠들 때는 가지고 있어야 해. 그래야 온 몸이 얼지 않거든. ”
“고맙습니다… ”
“크리오제닉이라면 그 낙인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보통 그런 낙인은 등에 찍히게 마련이지… 그럼, 잘 헤 봐. 내 동족을 죽인 건 괘씸하지만, 적어도 속죄하겠다는 인간에게 허튼 짓 할 생각은 없으니까… ”
“…… ”
“그런데 네녀석, 이름이 뭐냐? 같이 일하려면 적어도 이름은 알아야지. ”
“아… 저는 세이잔 코우기라고 합니다. ”
“코우기… 광휘인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저주를 짊어지는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