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III-3. 신의 한 수

늦은 저녁, 엘 푸르가토에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찾아왔다. 갓 대학 1년을 마치고 방학도 했겠다, 대학 친구들끼리 조촐하게 종강 파티를 하러 온 듯 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남학생 무리는 칵테일을 사람 수에 맞춰서 시키고, 나눠 먹을 안주도 함께 주문했다.

“우리도 이제 2학년이 되는구나. ”
“그러게. ”
“2학년은 무슨, 인제 군대 가야지. ”
“암울하게 왜 그러냐… 오늘만큼은 군대 얘기 꺼내지 말자. ”

남학생 무리 중 몇 명은 벌써 입대 날짜를 받은 모양이었다. 개중에는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도 있었고, 여자친구와 입대 전 정리한 사람도 있었고, 여자친구가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저마다의 칵테일을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한 명은 유난히 암울해보였다.

“저 친구는 어디 아픈 거 아냐? 따끈한 뱅쇼 한 잔 줄까? ”
“민성이요? 괜찮아요, 오늘 기말고사 칠 때까지만 해도 쌩쌩했어요. 아마 군대 가는 것 때문에 심난한가봐요. ”
“군대? 아아, 그치… 보통 이맘때쯤 가니까. 거기도 사람 사는데니까 너무 그렇게 심난해하지는 마. ”
“그게 아니라… ”
“그럼 왜? 생계 문제라도? ”
“실은, 민성이가 여친이 있는데… 군대 가 있을 동안 여친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예요. 민성이 여친이 좀 예뻐야죠. 거기다가 하필 저희 군대 갈 때 복각하는 선배중에 좀 반반하게 생긴 애들은 다 찔러본다는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 타겟이 남친이 군대 가 있는 애들이거든요. ”
“고무신이라… 불안하지. 그래서 정리하려고 했는데 여자친구가 자기는 기다려 줄 수 있다고 했지? 그래서 믿고 입대했는데 갈아탈까봐 불안한거고? 일말상초라는 말도 있잖아. ”
“그렇죠… ”

마스터는 선반에 있던 미니 냉장고를 열어 잼 통같이 생긴 것을 꺼냈다. 안에는 붉은 액체와 레몬 조각이 보였다. 병 안에 있던 액체를 잔에 1/3정도 채운 다음, 탄산수를 넣고 가볍게 한 번 저어준 마스터는, 가니쉬로 레몬 조각을 올렸다.

“불안에 휩싸인 젊은이에게는 특별한 서비스를 주도록 하지. 이 샹그리아에는 특별한 힘이 있어서, 네가 걱정하는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게 도와줄 수 있어. ”

민성은 마스터가 건넨 샹그리아를 한 모금 마셨다.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효과가 있는것인지 와인 향이 느껴지면서 그 동안 불안했던 것들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 뒤로도 남학생들이 한참동안 칵테일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젊은 남자가 엘 푸르가토로 들어섰다. 남학생들이 선배라고 부르는 걸 보면, 같은 과 선배인 듯 했다.

“여기서들 마시고 계셨군? ”
“형? ”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
“여자친구랑 한 잔 하러 왔지. 이놈들아, 아무리 그래도 머리가 몇명인데 마른 안주 달랑 하나 시켜놓고 먹고 있냐? 내가 소시지 하나 사줄게. ”
“괜찮아요, 저희 이것만 마시고 가려고 했어요. ”

남학생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각자 마신 칵테일 값을 계산한 다음 엘 푸르가토를 나섰다.

군대에 가기 전에 자취방 정리를 하던 그는 자취방에 있냐는 여자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금방 도착한 여자친구는 민성의 자취방 정리를 거들기 시작했다.

“짐들은 다 본가로 보낼거야? ”
“응, 내일 아버지가 실으러 오실 거야. ”
“그렇구나… 참, 나 너 군대 가 있는 동안 휴학할까 해. ”
“응? 휴학? ”
“응. ”
“나때문에 그러는거면 그럴 필요 없어. ”
“너 때문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휴학할 동안 아르바이트도 하고, 토익 공부도 할 거야.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나도 내돈내산 한번 해 보려고. ”

여자친구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다. 그 역시 몇 번 여자친구의 집에 가 봤고, 그럴때마다 대저택같은 집에서 두 사람을 반겨줬던 건 여자친구의 어머니와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아버지는 이름만 들어도 알 것 같은 회사의 대표였고, 요즘은 사업 확장건으로 바빠서 그녀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온 민성을 혹시나 고깝게 보지 않을까 했지만, 여자친구의 어머니는 그 동안 고생했다면서 앞으로도 우리 딸을 잘 부탁한다고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어머님은 뭐라셔? ”
“처음에는 반대했는데, 본격적으로 전공 공부 하게 되면 더 바빠져서 시간 없을거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두손두발 다 드셨지. ”

자취방 정리를 마친 민성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여자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시원시원하게 치켜올렸던 머리가 짧아지자, 여자친구도 민성의 입대가 그제서야 실감나는 듯 했다.

“잘 다녀와. ”
“응, 너도 잘 지내고. ”
“편지 할게~ ”

훈련소에서 고된 훈련을 받을 때도, 군수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자대 배치를 받아 군 생활을 할 때도 여자친구는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다. 휴가를 나올때마다 두 사람은 하루정도 만나서 데이트를 했고, 돌아갈때는 여자친구가 민성을 터미널에서 배웅해줬다. 한번은 여자친구가 면회를 온다면서 이것저것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해왔는데, 선임들도 후임들도 모두 음식이 비주얼도 맛도 다 챙겼다면서 호평일색이었다. 아마도 가정부 아주머니께 배운 솜씨였겠지.

힘겨운 군생활을 마치고 민성은 전역을 했다. 그리고 민성이 복학하는 시점에 맞춰서 여자친구도 복학을 했다. 오랜만에 복학한 학교에서 두 사람은, 같이 복학한 동기들은 물론 후배들과 함께 전공 수업을 듣게 되었다.

“이게 누구신가, 민성이 아냐? ”
“현태구나. 너도 복학했냐? ”
“아니, 나는 다음 학기에 복학해. 참, 너 그거 알아? 우리 전에 바에 갔을 때 만났던 형 있잖아. ”
“아, 수혁이형? 왜? ”
“학교에서 나갔대. ”
“수혁이 형이? ”

학교에서 운동도 만능에 학점까지 4.0 밑으로 떨어져본 적 없던 수혁이형이? 민성은 의아했다. 휴학을 했으면 했지 그 형이 학교에서 쫓겨날 형이 아닌데?

“그 형, 학점도 4.0 밑으로 떨어질 일 없었던 알파메일 아니었어? 왜 쫓겨난거야? ”
“너 몰랐냐? 하긴, 나도 들어서 안 건데 너라고 알았을 리가 없지… 우리 학교, 뉴스에 크게 났었잖아. ”
“뭐? ”
“어디 보자… 여기 있었는데… 아, 여기 있다. ”

현태가 찾아 준 기사는 ‘E 대학교 학생회의 민낯’이라는 제목이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기사를 읽어보니, 수혁이 학생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학생회 후배들을 폭행한 건 기본이고, 여후배들에게 학생회에서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 꼬드겨 강제로 몸을 섞거나, 학생회실에서 강간하기도 했다. 그는 학생회 회장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개강총회나 종강총회에서 여자 후배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든 다음 학생회실로 데려가 몸을 섞기도 했다.

“이럴 수가… ”
“이거야말로 완전 두 얼굴 아니냐? 겉으로는 멀쩡한 범생이인 척 하면서 뒤에서는… 어휴… 학생회비 횡령해서 불법토토 한 것도 까발려져서 학교에서 완전 강퇴됐대. 어쩌면 니 여친, 휴학한 게 신의 한 수였을지도 몰라. ”
“……! ”

기사를 읽은 민성도 그렇지만, 옆에서 함께 기사를 읽던 여자친구도 사색이 되었다.

“설마… 수혁이 형이 너한테도 접근했었어? ”
“휴학하기 전에 한 번 연락 왔었어. 학생회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스펙 쌓으려면 학생회 임원 정도는 한 번 해 보는게 좋다고 했었는데, 휴학할거라고 하니까 그 뒤로는 연락 안 왔었어. 나도 뭔가 이상해서 그 뒤로는 번호 차단했고… ”
“…… ”
“실은, 휴학하기 전에 나도 종강 기념으로 친구들이랑 전에 네가 갔던 바에 갔었거든… 그, 엘 푸르가토라고… 갔는데 마스터가 대뜸 날 보더니 서비스라면서 샹그리아를 한 잔 주더라. ”
“별 말은 안 했지? ”
“남자친구가 먹고 간 칵테일이라고만 했어. 내가 여자친구인 건 어떻게 알았냐니까 어쩌다보니 친구들이랑 얘기하는 거 들어서 알았다고만 했고… 마스터가 샹그리아를 주면서 특별 어드바이스라고, 나한테 남자친구가 군대 가 있을 동안은 너도 휴학하면서 자기계발을 하든 돈을 벌든 하라고 했거든… 그래서 휴학했던거고. ”

마스터가 어떻게 혜지가 민성의 여자친구라는 것을 알게 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스터의 말대로 혜지도 민성이 군대를 가 있는 동안 휴학을 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혁 선배 조심하라고도 했었어. 남자친구 전역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제안하는 건 뭐가 됐든 거절하고, 절대 혼자서 만나지 말라고. ”
“……! ”
“와, 소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