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III-4. 부패

시계가 새벽 한 시를 가리킬 무렵이었다. 공장 근무가 새벽에 끝난 모양인지, 세 명의 아줌마들이 엘 푸르가토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
“늘 먹던 걸로 부탁해요. 언니는 뭐 마실래? ”
“내일도 출근해야 해서, 술은 좀… ”
“여기 술 빼고도 만들어주니까 하나 골라봐. ”

고된 일을 마치고 마시는 칵테일이야말로,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에 비견될 정도로 달다.

“언니는 내일 아침에도 출근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
“나도 좀 쉬고 싶지… 그런데 딸내미가 또 한 건 했어… ”
“…… ”

또 사고를 쳤다는 말에, 다른 아줌마들은 잠시 숙연해졌다.

“걔도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언제쯤 철이 들려나… ”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데 그래? ”
“고소장이 날아왔어. ”
“고소장? ”
“그래… 이번에도 악플 썼다가 고소당했다고 날아왔지… ”
“이 언니,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봐요? ”

딸때문에 심난한 모양인지, 칵테일을 연거푸 들이키면서 한숨을 푹 쉬는 아줌마를 보고 마스터가 다가왔다.

“잘 됐다, 여기 마스터라면 언니 걱정을 좀 덜어줄지도 몰라. 여기 마스터가 모르는 게 없는 만능 해결사거든. ”
“그래, 언니도 언제까지 딸 뒤치닥거리나 할 수는 없잖아. 걔도 이제 서른 아냐? ”
“그건 그렇지… ”

칵테일 때문인지, 그녀는 마스터에게 고민거리를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딸이 하나 있는데 취직 할 생각도 없이 용돈을 받아서 생활한다는 것과, 매번 다른 사람들에게 악플을 받아서 고소를 당한다는 것, 그리고 그럴때마다 ‘엄마잖아’라면서 합의금을 내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까지.

“꽤나 심각하네요. 거기다가 구직활동을 하려는 의사조차 없으면서… ”
“자식도 걔 하나밖에 없어서 더 힘들어요… 남편은 딸아이가 어렸을 때 사고로 죽었고… 아마 남편이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혼내줬을텐데… ”
“음… ”

마스터는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아줌마에게 건넸다. 명함에는 ‘나쟈 선생’ 네 글자가 쓰여있었고, 뒷면에는 사무실로 보이는 곳의 주소와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여기로 가시면, 아마 문제가 해결될거예요. 다만, 그게 언니가 원하는 방향인지는 모르겠지만… ”

원하는 방향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결된다는 말에 여자는 다음날 명함에 적힌 곳을 찾아갔다. 명함에 적힌 주소지를 물어물어 찾아가니 폐건물이 한 채 보였다. 언제부터 폐건물이 된 건지도 모를, 외벽이 다 벗겨진 건물이었다.

“실례합니다. ”

건물 안에는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천장 위쪽으로는 군데군데 거미들도 모여있었다. 퀴퀴한 냄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네. ”

어딘가 나른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안에서 하얀 여자가 나왔다. 하얀 얼굴에는 붉은 눈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위로 앞머리로 가려졌지만 공처럼 둥근 눈이 얼핏 보였다. 요즘 몸이 허해서 헛것을 보았나, 그녀는 생각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
“저, 이걸 받아서… ”

하얀 여자는 그녀에게서 명함을 건네받았다.

“이건 어디서 받으신거예요? ”
“어제 엘 푸르가토에 갔는데, 거기 주인장이 줬어요. ”
“그렇구나… 마스터가 이걸 줬다는 건, 고민거리가 있다는 얘기겠죠. 일단 들어오세요. ”

하얀 여자를 따라 사무실이 있었던 곳으로 가니, 사장실 같은 곳이 있었다. 그녀를 의자에 앉게 한 하얀 여자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두 병 꺼낸 다음, 한 병을 그녀에게 건넸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건가요? ”
“실은, 딸때문에… ”

그녀는 지금까지 딸때문에 힘들었던 일들을 전부 하얀 여자에게 털어놓았다. 첫 직장은 석 달 정도 다니다가 잘렸고, 그 후로는 자격증 시험을 본다거나 공무원 시험을 본다거나, 여러가지로 하고 싶은게 있다고 해서 그녀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었다. 인강이나 문제집은 물론이고 독서실까지, 필요하다는 건 전부 해 줬다.

“그럼 따님은 시험에 매번 떨어져서 장수생이 되신건가요? ”
“그렇게 된 거면 억울하지도 않죠… 시험 친다고 얘기만 하고 한번도 시험 친 적 없었습니다. 언제 시험 칠 거냐고 뮬어봐도, 매번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말만 했죠. 그러다가 알게 된 겁니다, 인강도 문제집도 실제로 산 적 없고 그 돈으로 놀기만 했다는 걸… ”

시험 공부때문에 필요하다고 받아갔던 용돈은 전부 유흥비로 날려먹고, 시험은 정작 준비가 안 됐다며 보지도 않았다. 남편이 죽고 명절에 친척 모임도 잘 안 갔지만, 어쩌다가 가더라도 딸은 오지랖이 싫다면서 가지 않았고 혼자 갈 뿐이었다. 그렇게 집에 처박혀서, 딸은 하루하루 시간을 썩혀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소장이라는 걸 받았습니다. ”
“고소장이요? 어디서 온건가요? ”
“아이돌 소속사에서요. 라이트닝 보이즈에게 악플을 달았다가, 소속사에서 고소했어요. ”
“따님때문에 엄한 어머님이 욕을 드셨군요. ”

정곡을 찔렸지만, 맞는 말이었다. 자식이 잘못하면, 가정교육이 문제라면서 부모가 욕을 먹게 마련이니까.

“어머님은 따님께서 왜 그렇게 되셨다고 생각하세요? ”

나쟈 선생의 질문에,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분명 초등학생때는 성적이 우수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크게 모날 것도 없었고 받아쓰기도 100점을 받던 아이였다.

“어릴 적에는 정말 성실한 아이였어요. 늘 밝고… 매일 친구들도 집에 데려와서 놀고, 공부도 아주 상위권까지는 아니었지만 잘 했어요. ”

그랬던 딸이 ‘엇나갔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딸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딸은 운동에 재능이 있었다, 적어도 중학생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런 제의를 받은 적 있었고, 그것때문에 체대 입시를 준비하려고 학원도 다녔었다. 남편이 사고로 죽은 후로도, 그의 어머니는 물심양면으로 딸이 체대 입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맞아, 그 때였어요… ”

재능이 아예 없거나, 재능이 뛰어나다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재능이 아예 없는 편이라면, 그리고 빨리 그것을 인정한다면 포기하고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달란트였다. 하지만 딸은 재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뛰어나지도 않았으며, 그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체대 입시를 준비하던 학원에서 저를 불렀어요. 그래서 갔는데…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

학원에서 면담을 하고 싶다며 그녀를 불렀을 때, 그녀는 딸의 재능이 어중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질도 어느정도는 있고 운동신경도 어느정도는 있지만 예체능을 그녀의 진로로 할 정도는 아닌, 어중간한 재능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일반인들보다는 소질이 있지만 체대로 진학할만큼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저는 딸이 상처받을거라 생각해서…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까 그만둬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재능이 어중간하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요… ”
“따님을 위해서 했던 말이 악수가 되었군요… 어머님. 때로는 거짓보다 진실이 답일 때가 있습니다. ”

집은 가난했지만, 덕분에 나라에서 장학금이 나와서 대학 학비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이 어중간해서가 아니라 가난때문에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던 딸은 엄마를 미워했다. 자신과 엄마를 두고 먼저 가버린 아빠도 미워했다. 가난한 집안을 원망하면서, 가야 할 길을 정하지 않고 시간은 그대로 부패할 뿐이었다.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겠다는 것도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당장 진로는 결정하지 못 했고 사람들의 ‘졸업하면 뭐 할거냐’는 질문 세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따님과 얘기는 해 보셨나요? ”
“몇 번 얘기는 해 봤지만, 나아지지 않았어요. 내일부터 할 거라고 얘기는 했지만, 항상 그대로였어요. ”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딸을 위해서 그녀는 일을 늘렸다. 겨우겨우 월급을 받아서 문제집이라도 사고, 인강이라도 들으라고 용돈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딸이 그 용돈들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시험을 언제 칠 거냐고 물어봐도, 매번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됐다… 그러다가 알게 된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줬던 용돈들은 유흥비에 썼다는 것을… ”

매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지만, 사실은 준비를 안 하고 있었다. 없는 살림에 일자리를 늘려서, 식사를 한 끼 줄여가며 아껴서 마련한 용돈은 그대로 유흥비가 되고, 게임 아이템이 되고, 부패하는 시간과 함께 사라져갔다.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내일은 할 거라고 입으로만 말하면서, 여전히 게임을 한다.

그러다가 집으로 날아온 고소장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피싱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딸에게 네 이름으로 고소장이 날아왔다고 하자 딸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는 고소장을 뺏어들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처음에는 피싱인 줄 알았어요. 딸애의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그리고 저에게 실토하기 전까지는… ”
“합의금도 내셨겠군요. ”
“네… 어떻게든 마련해서 지불했어요. ”

부패한 시간속에서 지내온 딸에게 합의금을 지불할 능력이 있을 리 없다. 오히려 합의금을 지불하겠다고 사금융에 손이라도 댈 지 모를 노릇이다. 그리고 그것만은 막기 위해서, 엄마니까 그래도 내 딸을 지키기 위해서 합의금을 겨우겨우 마련했다. 신용 등급에 영향이 가더라도 앞날이 창창한 딸보다는 자신의 신용 등급에 영향이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합의를 할 때는 그래도 사과를 했지만, 그 뒤로도 고소장이 여러 번 왔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그녀는 엄마니까 딸을 위해 일을 했다. 겨우겨우 합의금을 마련하고, 용서를 구하고, 일단락되고 나면 또 다시 고소장이 날아온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이제는 우편함에 뭔가 꽂혀있으면 지레 겁부터 먹을 정도였다.

“음… 지금까지 고소장이 왔던 곳들로 미루어보건대, 따님은 주로 예체능 종사자들에게 악플을 달았군요. ”
“…네? ”
“라이트닝 보이즈는 가수고, 두 번째로 악플을 달았던 사람은 배우예요. 그 외에도 운동선수나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들 예체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였어요. ”

이제는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물어본다 한 들 대답해 줄 리 없었다. 딸과 대화를 해 보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는 늦은걸지도 모르겠다.

“어머님, 제가 따님을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
“그 아이가… 만나줄까요? ”
“만나줄지 어떨지, 장담은 못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풀어나가려는 노력도 한번쯤은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나쟈 선생의 연락을 받았다. 나쟈 선생이 직접 딸을 만나서 대화해본 건 아니지만, 나쟈 상담소를 통해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어머님, 죄송하지만 이대로 따님을 갱생시킬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

그리고 나쟈 선생은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대로 생활하면 두 사람에게 독이 될 거예요. ”

나쟈 선생은 나쟈 상담소를 통해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공부한다고 들었다고 이야기하자, 딸은 거기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컴퓨터가 인강을 듣기에 성능도 좋지 않았고 핸드폰으로 인강을 들으려고 하면 별의별 곳에서 연락이 와서 방해한다며 핑계를 대기에 급급했다. 나쟈 선생이 새 컴퓨터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 볼 생각이 없냐고 했더니, 딸은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싶어도 조건에 맞는 일은 찾기가 힘들다고 했다. 이 일은 이래서 싫다, 저 일은 저래서 싫다, 제안하는 것마다 하나씩은 싫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체대 입시에 대해 물었을 때, 딸은 자신은 충분히 체대 입시를 준비할 수 있었는데 집안 형편때문에 그만두게 된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와서 사실을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쟈 선생은 잠시 고민했지만 어머니에게 맡기기로 하고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당신이 그러고 밍기적거릴 시간에 어떻게든, 뭐든 하려고만 생각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로 상담을 마무리했다.

“어머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해 주세요. 집에 가셔서, 따님에게 진실을 말씀하세요.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으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
“전부…요? ”
“따님이 상처를 받지 않게 하려다가 어머님이 몇 배로 상처를 더 받으셨잖아요. 분명 사실대로 말씀하셨더라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래도 따님에게 진실은 알리셔야 합니다. ”

나쟈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간 그녀는 습관처럼 우편함을 확인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오지 않았군, 집으로 들어가니 평소처럼 돼지우리같은 방에서 딸이 네튜브를 보고 있었다. 운동쪽 네튜브를 즐겨 보는 걸 보면, 아직 그 쪽에 미련이 있는 모양이다.

“윤서야. ”
“어, 왜. ”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거실로 와 주겠니? ”
“여기서 하면 안 돼? ”
“중요한 얘기라 그래. ”

윤서를 거실로 부른 그녀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다면서, 그 날 학원을 그만두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윤서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집안 형편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체대 입시를 준비할만큼의 재능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계속 학원을 다녔더라면 장수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선생님이 이것때문에 면담을 요청해서 그 때 학원에 갔던 것까지 전부.

“미안하구나. 그 때 사실대로 얘기했어야 했는데… ”
“…… ”
“선생님도 오랫동안 지켜보고 내린 결정이라고 하셨어. ”
“그럼… 가정 형편때문이 아니라 내가 못해서 그런거였어…? 그래서 선생님도 그런 말을 하셨던거구나… ”
“선생님이 그 때 뭐라고 했었니? ”

학원을 마치고 돌아가던 날, 선생님은 윤서를 불렀다. 그리고 어머님을 한 번 뵈었으면 한다는 얘기와 함께 운동하는 게 좋냐고 물었었다. 운동하는 게 좋고, 그래서 이 길을 택한거라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꼭 체대에 들어가고 운동선수가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윤서의 재능이 어중간하기 때문에 빨리 다른 길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길을 걸으면서 운동은 취미로 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공무원 시험도… 사실 졸업하면 뭐 할 지 물어보는 게 싫어서 치겠다고 했어. 엄마, 나 공무원이랑 안 맞아… 그치만 형편이 안 좋으니까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게 싫었어… 그 ‘뭐라도’가 뭐라고…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걸 가난때문에 못 한다는 게 치가 떨리게 싫었어. ”
“…… ”
“연예인들도, 운동선수도 전부 부러웠어. 어릴적부터 꿈이었던 걸 이룬거니까… 동시에 화도 났어. 꿈을 이루기 위해 그 사람들도 노력을 했지만, 가정환경도 받쳐줬겠지… 하지만 우리 집은 그렇지 못했으니까. ”

오랜만에 그녀는 딸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엇나갔던 이유도, 학원에서 그녀 뿐 아니라 딸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럼에도 조금만 더 할 수 있었을텐데 가난때문에 그만 뒀다고 생각했었다는 것도. 물론 그런 이유로 악플을 달았다는 것 자체가 용서되지는 않는다, 그건 그녀도 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돈 몇 푼에 그들이 받았던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을테니까.

며칠 후, 윤서는 혼자서 나쟈 선생을 찾아갔다. 분명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일텐데도, 나쟈 선생은 구면인 듯 윤서를 맞았다. 그리고 윤서가 하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그럼 윤서양은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
“그게…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찾아보기엔 너무 늦은 것 같고… ”
“서른이라는 나이는 어떻게 보면 늦은 나이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
“…… ”
“윤서양이 지금까지 부패시킨 시간을 털어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세요. 음식에 곰팡이가 피면 버려내는 과정이 필요하듯, 지금은 윤서양에게도 그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학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것처럼, 꼭 운동을 하고 경기를 뛰는 것만이 체육계에서 종사하는 것은 아니예요. 운동 기구를 팔 수도 있고, 체육 교사를 할 수도 있고, 운동 강사가 될 수도 있어요. 윤서양이 가고자 한다면, 길은 열려있어요. ”
“하지만, 저는 전공도 다르고… ”
“세상에는 대학 전공과 본업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어요. 윤서양이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여기를 찾아가세요. ”

윤서는 나쟈 선생이 건넨 명함을 들고 낡은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 문에는 ‘전노대부’ 네 글자가 쓰여있었고, 안에는 풍채가 좋은 남자들이 몇 명 있었다.

“아가씨는 여기 올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
“저… 나쟈 선생이라는 사람이 여기로 가라고 해서 왔는데… ”
“나쟈 선생이 보내서 왔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들어오슈. ”

사무실 안에 있는 남자들의 인상이 험악해서 긴장했지만, 남자들은 윤서가 돈을 빌리려고 하는 사정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자격증 공부를 하려고 한다는 말에 학원비를 대출해주면서 가정 형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나라에서 학원비 내 주는 제도도 있으니 알아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돈은 취업하면 천천히 갚아도 되고, 아가씨는 그래도 부패한 시간을 청산하려는 노력은 있는 것 같으니 이자는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네. ”
“이자를 받지 않는다고요? ”
“우리는 이자도 사람 가려서 받아요. 만약 아가씨가 유흥비로 쓸 목적으로 돈을 빌리러 왔다면, 법정 최고 이자로 받았을거요. 하지만 아가씨가 다시 공부할 목적으로 돈이 필요해서 온 거니까 이자를 받지 않는거고. ”

학원비를 빌린 윤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에 설치했던 게임을 지웠다. 지금까지 키워온 건 아깝지만, 부패한 시간을 청산하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걸려야 부패한 시간을 청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 부패한 시간을 청산하리라 믿고, 그녀는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