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9. 괴의(怪醫)

괴의라 불리는 존재가 있다.

괴의는 역병 의사 가면을 쓴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두툼한 가죽 코트에 가죽 장갑, 가죽 부츠로 전신을 가리고 허리에 작은 가방을 멘 존재였다. 괴의를 실제로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뜬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괴의의 손길이 닿으면 죽어가던 불치병 환자가 순식간에 낫고, 반대로 멀쩡하던 사람이 불치병 환자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다지만 그건 아니지, 그게 괴의를 허구로 치부하는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후아암… 잘 잤다… ”

여기는 판데모니움에 존재하는 공간 중 하나인 괴의 공간. 마치 대학교나 기업에 있을법한 실험실같이 생긴 이 곳은, 두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얀 내벽으로 칠해진 아래층에는 각종 실험 도구와 수술 도구, 그리고 실험용 기기들과 재료, 실험대가 있었고 실험대에는 논문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논문이 놓인 실험대 한쪽에는 펜꽂이도 보였지만, 안에 펜은 하나도 없었다. 하얀 내벽 한쪽을 가득 채운 것은 시약장이었고, 시약장 안에는 각종 화학물질들과 약초, 책들이 꽂혀있었다. 시약장 옆에는 종이가 한가득 들어있는 박스도 보였다.

그 다음, 복층처럼 생긴 위층으로 올라가보면 역시나 하얀 벽으로 칠해진 방이 보인다. 아래층보다 조금 좁은 방은 한쪽 벽을 책꽂이가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책꽂이 칸마다 책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벽으로 나뉜 공간에는 조리대와 냉장고, 침대와 컴퓨터가 설치된 책상이 보인다. 아래층에 있는 실험대와 달리 위층에 있는 책상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방 안에는 옷걸이가 있었고, 옷걸이에는 가죽 코트와 역병 의사 가면이 걸려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주황색 머리를 가진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 다음 아침을 먹고,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를 한참 들여다보던 여자는 뭔가 재밌는 것이라도 찾은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주황색 머리를 가진 여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SD입니다. 사이트에 올라온 글 보고 연락드렸어요. 자세한 내막을 좀 듣고싶은데, 한번 만나뵐 수 있을까요? 네, 네. 편하신 시간대랑 장소 알려주시면 거기로 가겠습니다. ”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 뒤 코드를 입고, 장갑을 끼고 가죽 장화를 신은 다음 역병 의사 가면을 끈다. 호박색 눈을 가린 가면을 쓰고, 엉덩이에 살랑거리는 꼬리를 코트 자락 안쪽으로 넣은 그녀는 판데모니움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괴의 공간을 나선 그녀는 순식간에 중간계로 도착했고, 전화기 너머의 상대와 약속한 장소로 갔다. 그녀가 도착한 장소는 G구에 있는 지식 산업단지로, 마침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점심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라 직장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피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가운데,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역병 의사 가면을 보자마자 이쪽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사원증이 걸려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일단 근처 카페로 가시죠. ”
“아, 네. ”

카페에 들어선 남자는 그녀의 몫까지 음료를 주문했다. 그리고 주문한 차 두 잔이 나오자,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드세요. ”
“감사합니다. ”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연을 올리긴 했지만, 정말로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
“…… ”

남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자가 그녀에게 글을 남겼던 이유는, 그의 직장 선배 때문이었다. 첫 직장이었고, 신입이라 어리버리 할 때 그를 제일 많이 도와줬던 게 그 선배였다. 문서 작성하는 법이나 직장생활 팁같은 것도 이것저것 가르쳐주던 선배는, 수술을 받는다며 한동안 나오지 않았었다. 짬을 내어 병문안을 갔을 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간 이식 수술을 해 주고 회복중이라고 했었다.

그는 물론이고 간 공여자였던 그의 회사 선배조차 간과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 간을 공여하고 난 후 재생이 된다 한들 이전과 동일한 상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회복중이고, 곧 돌아가겠다고 했던 사람은 며칠 후 수척해진 얼굴로 나타나 사직서를 내고 갔다. 그 때 그 사람의 몰골은, 말 그대로 거무죽죽한 얼굴이었지만 건축 현장에서 일하거나 바다에서 태운 것과는 달리 한 눈에 보더라도 아파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거무죽죽이었다고 했다.

“그 뒤로 병문안을 갔는데, 휴우증때문에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
“원래 장기 이식은 휴우증이 심각합니다. 의사들은 그런것까지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요. 그래도 여자친구가 있으면 어떻게든 살 의지는 부여되지 않을까요? ”
“그게… 그 여자친구가 김 주임님이 그렇게 된 걸 알고 파혼했답니다. ”
“파혼이요? ”
“네. 처음에 김 주임님이 간 이식을 결심했던 것도 결혼할 사이이니까 그런거였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 나니까 파혼한거죠. ”
“…… ”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아직 가족도 아닌 타인에게 장기 이식을 해 달라고 해 놓고, 휴우증이 생기니까 버리고 간다고? 그 정도도 감수 못 할거면서 그런 요구를 했단 말인가?

“그 김 주임이라는 분, 지금 만날 수 있습니까? ”
“마침 오후에 반차 썼으니까 지금 같이 가면 될거예요. ”

그녀는 남자와 함께 김 주임이라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병들어버린 것 같은 거무죽죽한 얼굴에, 황달 탓인지 누렇게 뜬 눈을 하고 있었다.

“김 주임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
“오늘은 그래도 좀 덜하네요. 그런데 이 분은…? ”
“SD입니다. 스트레인지 닥터 닷컴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분 통해서 얘기는 들었는데, 상태가 심각하네요… 어쩌다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되신겁니까? 결혼하지도 않은 사이에… ”
“예비 장인어른이기도 하고… 결혼할 때 그래도 여자친구 손 잡고 건강하게 들어왔으면 해서 그랬습니다… 지금은 떠나간 지 오래지만요. ”
“…… ”

그녀는 대답 대신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그녀는 김 주임에게 그 약통을 건넸고, 약통을 건네받은 김 주임은 약통을 열어보았다. 약통 안에는 하얗고 작은 알약이 들어있었다.

“일단 이걸 아침 저녁으로 두 알씩 드시면 더 악화되지는 않을겁니다. 빠른 시일 내에 수술 날짜를 잡도록 하죠. ”
“수… 수술이요? ”
“적어도 그 몸은 원래대로 되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분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저한테 글을 남겼더군요. ”
“하지만, 저는 모아둔 돈도 약값으로 다 써버려서 돈이 없는데… ”
“당신은 수술비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그 약 꼬박꼬박 드시면서 계시면, 제 쪽에서 이 분 통해서 연락하도록 하죠. ”

김 주임의 집을 나선 그녀는 고키부리 사무실로 연락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여자쪽을 수소문해 줄 수 있겠냐는 얘기를 전했다.

“간 이식을 받은 분만 찾아주면 되는건가요? ”
“네. 일단 간 이식을 받은 분을 만나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들어보고 결정하려고요. ”
“알겠습니다, 아마 공여자 성함만 알면 금방 찾을 수는 있을겁니다. ”

며칠 후, 도희는 그녀에게 간 이식을 받은 사람이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전했다.

“병원에요? ”
“아마 거부반응 때문일거예요. 타인의 장기이다보니 거부반응이 없을 수는 없으니… 그나저나 그 쪽으로 잠입했던 정보원의 얘기를 들어봤는데, 수술받았던 분께서는 그럴 의사가 없었는데 그 딸이 종용했다고 하네요. 그 남자분, 상태가 심각한가요? ”
“일단 약을 처방해서 지금보다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심각해요. 아무튼, 그럼 아버지 쪽에서는 받을 의사가 없었는데 여자쪽에서 종용했다는 얘기죠? ”
“네. 그 여자분도 아마 공여자랑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걸로 알아요. ”
“알겠습니다. ”

전화를 끊은 그녀는 괴의 공간으로 들어가 수술 준비를 하고, 며칠 전 만났던 남자에게 연락해 지금 바로 수술에 들어갈테니 김 주임의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전했다. 전신마취를 하려면 하루정도는 굶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바로 수술이 가능하냐는 남자의 질문에, 그녀는 가능하다고 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남자는 김 주임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 준비는 끝났으니까 바로 수술 들어가면 됩니다. ”
“지금 여기서 바로 수술을 하신다고요? ”
“여기서 수술은 힘들고, 제 병원으로 갈 겁니다. ”

그녀는 김 주임의 팔에 링거를 꽂았다.

“안에 마취제가 들어있어서 좀 나른할거예요. ”

김 주임을 그녀의 공간으로 데려간 그녀는, 수술을 시작했다. 김 주임이 그녀와 함께 사라지고 두세시간 정도 기다릴 무렵, 그녀는 김 주임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김 주임은 전에 만났던 멀끔한 얼굴에, 한쪽 손에는 링거를 꽂은 채였다.

“주임님! 몸은 좀 어떠세요? ”
“아직 회복이 조금 덜 됐지만, 지금 기력이 없는 건 내일이나 모레쯤 회복될겁니다. 공여하기 전 상태로 완전히 되돌아갔으니까, 이제 전처럼 다시 직장생활 하시면서 좋은 분 만나세요.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비용은 얼마가 되든 조만간 지불하겠습니다. ”
“전에도 말씀드렸듯, 당신들은 수술비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대신 낼 거거든요. ”
“……? ”

그녀가 뜻 모를 말을 남기고 사라진 며칠 후, 김 주임은 몸이 완전히 다 낫자 복직했다.

“김상영 주임, 몸은 괜찮은 거 맞아? ”
“이제 술도 마실 수 있고, 쌩쌩해요. ”
“그거 다행이군. 그동안 일 못했던 만큼, 열심히 하라고. ”
“안그래도 그러려고요… 본의아니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부장님. ”
“아니야, 아니야. 자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 그러지 말게. ”

자리로 돌아갔던 상영은 옆자리가 빈 것을 확인했다. 원래 그의 옆자리에는 그의 전 연인이었던 사람이 일하고 있었는데, 책상이고 뭐고 하나도 없이 깨끗했다. 마치 아무도 없었던 것 마냥, 책상에 종이 한 장 남아있지 않았다.

“이쪽 자리는… 아예 빈 거예요? ”
“네, 며칠 전에 나가셨어요. 아파서 요양해야 할 것 같다고… ”
“아파서요…? 그럴 분이 아닌데…? ”
“그게, 저희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이전까지 되게 건강하셨던 분인데, 갑자기 얼굴이 거무죽죽해져서는… 김 주임님 예전에 사직서 내러 왔을때처럼 와서 사표 내고 가는데, 무슨 좀비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
“우리 성격 좋으신 김 주임님 막 대한 죄 받은거죠, 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