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그리고 따뜻한 미소.
하지만 나는 이내 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다들 이미 짝이 있는 거지…?
“안녕, 시트로넬? ”
“아, 안녕하세요. ”
이제는 태연히 그를 마주하기도 힘들지만, 더 이상 내 마음을 말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지옥과도 같았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고통 받으며 사랑을 포기 당해야 하는 걸까.
“참, 시트로넬. 오늘 내 준 과제 말인데… 제출이 언제까지였지? ”
“아마… 다음 주 화요일이요? 아아, 화요일이네요. ”
“아, 그런가… 고마워. ”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탄하기를 며칠. 이제는 지쳐버릴 것만 같다.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기분이 뭔지, 그 사람은 알까. 아니, 모를 거야. 아마도…
그렇게 짝사랑에 가슴앓이 하길 며칠,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느 새 나타나 자신을 바라보다 사라져 가는 그녀, 그리고 책상 위에는 낯선 가위가 있었다.
가위를 집어 들려고 하면 가위는 마치 그의 손을 일부러 피하듯 움직였다.
그 꿈을 며칠째 계속 꾸던 그는, 길을 걷다가 꿈 속에서 봤던 가위를 발견했다. 연보라색 손잡이가 달린 평범한 문구용 가위. 꿈 속에서처럼 가위는 그의 손을 피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가위를 주워 들었다.
‘뭘까, 대체 이 가위는… ‘
가위를 들고 오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꿈 속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가위와, 그녀의 존재. 그리고 자신을 피할 듯 움직이는 가위까지. 마치, 가위 안에 그녀가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온 그가 가위를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그녀는, 며칠 전 사라졌던 그녀였지만 어딘가 달랐다. 온통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그녀를 모방하는 무언가를 보는 것 같았다.
“!!”
“결국, 여기로 오게 되었군요. ”
그가 알던 그녀와는 완전히 달랐다. 무미건조한 말투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그를 바라보는 눈은 마치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
“너… 너, 시트로넬이야? 정말 시트로넬이야? ”
“예. ”
“걱정했었어.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한동안 수업도 안 나오고 보이지도 않아서 걱정했어. ”
“…저를요? ”
그녀는 아무 표정도 없이,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외로군요, 저를 걱정하셨다니… ”
“……? ”
마치 그녀의 형태를 한 다른 무언가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이질감에, 그는 뒷걸음질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가위 손잡이에 검지손가락을 끼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정말 너야? ”
“네. 저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저를 따라한다는 건, 기분 나쁜 짓이죠… 그런 녀석이 나타난다면 얼마든지 잘라버릴테니까요. ”
“…… ”
“아아, 어찌됐건 결국 이 곳으로 오게 될 줄 알았습니다. …뭐, 이제나마 오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분노해야 할 지… 아니, 분노는 뭔지, 기쁨은 뭔지는 지금에 와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자아를 잃어버린 껍데기에게 남은 것은 ‘무’뿐이니까요. ”
“…… 그게 무슨 말이야? ”
“당신은 이해하지 못 할 겁니다. 아마,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죠. ”
그녀는 뜻 모를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날 이후, 그는 그녀를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리려고 노력했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것들을 사 주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거나, 함께 무엇이든 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은 건지, 어쩌면 그녀는 지금 이대로 만족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녀가 애태웠던 날들만큼, 그 역시 애태우며 그녀를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려보려고 노력했다.
“시트로넬, 괜찮으면 같이 산책이라도 나가지 않을래? ”
“아뇨. ”
하지만 그녀는 냉담했다. 마치 심장이 얼어붙은 양,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이런 노력들을 몰라주는 것만 같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아픈 나날들의 연속,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 그는 점점 지쳐갔다.
“자기, 요즘 뭐 힘든 일 있어? ”
“…응? 아, 아냐… ”
“참, 실종됐다던 그 후배는 어떻게 됐어…? ”
“아아… 돌아는 왔어. ”
“다행이네… ”
그 아이가 나를 만났을 떄 느꼈을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그는 생각했다. 속은 쓰리지만 겉으로는 꼭꼭 숨겨야 하는, 그렇게 깊이 파 묻어버려야만 하지만 파 묻을 수 없는. 내 옆에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이제는 여자친구보다는 그녀 쪽이 더 걱정되는.
“저기… 지연아. ”
“…응? ”
“우리, 잠깐만 시간을 좀 갖자… 나, 요즘 너무 힘들어… ”
“…… ”
“미안해. ”
그는 그녀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 오셨습니까. ”
“응… ”
그는 힘없이 대답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언제까지 이런 나날들이 계속 될 지 모르겠다.
-이봐.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형체 없는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누구야? ”
-너, 그 아이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지?
“…… ”
-그 아이는 오래 전, 널 짝사랑하고 있었어. 하지만 네가 이미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지… 그 끝에, 결국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가위에 깃들어버려 이렇게 된 거야. …적어도 넌 그 아이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었던 거잖아?
“맞아… 난, 시트로넬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어… ”
-좋아. 네 소원은 이루어졌어.
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밖에서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듣고 내려갔을 때,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듯한 눈으로, 그녀는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과 달리 밤하늘을 닮은, 짙푸른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었다.
-문 열어! 문 열란 말이야!
“!!”
“제 선물, 어떻습니까? ”
“…… 무슨 말이야? ”
“덕분에, 저는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기를 불어넣을 수 있게 됐죠… 그래서, 보답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
-어서 문 열어!
문고리에 뭔가를 넣고 돌리고 있는 모양인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어록을 억지로 열려고 버튼을 마구잡이로 누르는 소리도 들렸다. 마구잡이로 누르다 틀리기를 몇 번, 아예 그녀는 도어록을 잡아 뜯을 기세였다.
“…지연아? ”
-역시 안에 있었구나! 금방 기다려, 내가 갈개!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건,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도어록을 뜯다가 안 되겠는지 아예 문을 밀어붙이는 소리까지 들려 온다. 뭔가 대처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싸늘한 기운이 전신을 감돌고 있었다. 그는 그저, 문 밖의 대상에게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지연아, 돌아가! 여기서 이러면 안 돼! ”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말에 아랑곳 않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시도를 했다.
-콰직
마침내, 도어록이 버티지 못 하고 부서지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보인 그녀는, 아까까지 만났던 그녀와는 전혀 달랐다. 예쁘게 단장하고 곱게 묶었던 머리는 마구 풀어 헤쳐져 있었고, 온 몸은 날붙이로 난자 당했는지 상처 투성이였다. 게다가 하얀 스웨터는 얼룩 투성이였다.
“찾았다… ”
그녀는 오른 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
“자기야, 어디 가… 나 버리고 갈 셈이야…? 이 년은 또 누구고…? 잠깐 생각해보자고 하고 이 년 만난 거야…? ”
“그게 아니라… ”
“변명 같은 거, 듣기 싫어…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
“!!”
“이만 죽어줘. 그리고 영원히 함꼐 하자… ”
그녀가 식칼을 들고 한 발자국 다가왔다. 천천히 다가올 때마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던 그녀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새 그녀가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이제… 우리, 함께야…… 쭉…… ”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푹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무언가 차가운 게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칼을 휘두르던 그녀를 뒤에서 시트로넬이 가위로 찌른 상태였다.
“재미 없어. ”
“!!”
“윽… 아- ”
“…… ”
그는 말없이, 그녀의 하얀 스웨터가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바라 볼 뿐이었다.
“선물이 너무 과격했군요. 이런 건, 선물이 아니예요. 폭탄일 뿐이지… 그렇죠? ”
“아아…… 지, 지연아! ”
눈 앞에 쓰러져 있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여자와 붉게 물들어버린 옷. 그리고 그 뒤에서 그를 조롱하듯 바라보는 그녀. 그는 순간 사고가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이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대로 멈춰버리길 바랐다. 어째서 그런 소완을 빌었을지, 그는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은 그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내가 사랑했던 연인은 이미 죽어버렸고, 내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바랬던 사람은 광기에 절어버릴 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 ”
그녀는 넋을 놓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그를 바라볼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음…? 나는 당신이 바라던 대로 원래대로 돌아 왔을 뿐인데, 어째서…? ”
-이봐.
그녀에게 형체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
-들려? 이 몸은 리바이어던이다. …네녀석, 대체 무슨 능력을 얻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리바이어던…? 심연의 리바이어던? ”
-그래, 내가 바로 심연의 리바이어던.
“…너는, 이 사람이 왜 이러는 지 알고 있는거지? ”
-그야, 네녀석의 선물을 빙자한 폭탄을 받고 미쳐버렸으니까.
“미쳐버렸다고? ”
-그래. 네가 저 여자에게 광기를 불어넣어 패닉으로 몰아갔고, 그게 하필 사랑하는 연인이었어. 게다가 사랑하는 연인을 네가 아무렇지도 않기 눈 앞에서 죽여버렸지… 어떨 것 같냐? 그 상황에서 미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 ”
-네녀석, 능력은 상당한 것 같은데 어째서 이런 우를 범했는 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래도 꽤 흥미롭군, 광기를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이라… 너, 나랑 거래 할래?
“거래? ”
-그래. 너에게 심연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을 줄게. 그 안에 있는 기억을 들여다보고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말이야.
“그럼 난 뭘 줘야 하지? ”
-네가 줄 건 아무것도 없어. 이건 단지, 네가 흥미로워서 주는 선물이니까.
“좋아. ”
-그럼, 거래는 성사됐어. 바이바이~
형체가 없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여전히 미쳐버린 남자와 하얀 머리의 여자였다.
“…… 심연 속을 들여다보고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던가… ”
그녀는 눈앞에서 연인이 죽어간, 그를 미쳐버리게 만든 기억을 그의 심연 속에 묻어버리곤 집을 나섰다. 아마,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참상을 본다면 뭐라고 할 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