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V-5. 금의환향

“재우씨, 무슨 고민 있어? ”
“주말에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하필이면 전여친 결혼식이지 뭐예요. ”
“전여친이 결혼식에 불렀다고? ”
“부르는 전여친이나 거절 안 하고 그걸 가는 재우씨나 참… 연구대상이야. ”

그의 전여친은 소위 말하는 속물이었다.

데이트 할 때는 한번도 자기가 돈을 낸 적이 없었고, 선물은 항상 명품이어야 하며, 밥은 항상 비싼 곳에서 먹어야 했다. 기념일도 매번 챙겨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면서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거기다가 시도때도 없이 친구의 남자친구와 그를 비교하기 일쑤여서,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연애라는 건 괴로운거라고 생각했었다. 여자친구였던 사람과 헤어지게 된 것도, 그보다 돈이 많은 남자와 바람이 나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송재우씨,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
“회장님께서요? ”
“네, 바로 회장실로 가보세요. ”

송 비서로부터 회장님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은 그는 건물 꼭대기 층으로 갔다. 파리아 본사가 있는 건물의 꼭대기 층은, 회장이 한 층을 통으로 쓰고 있었으며 직원들에게 있어서는 출입 엄금인 공간으로 불렸다. 가끔 회장이 내려오는 일은 있었지만, 직원쪽에서 먼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실례합니다. ”
“들어오세요. ”

재우가 회장실로 들어갔을 때, 회장은 업무를 보고 있었다. 업무를 보던 그는 재우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하던 일을 잠시 멈추었다. 커피도 직접 내려서 마시는 모양인지, 사무실을 커피 냄새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절 부르셨다고 들어서 왔습니다. ”
“아, 네. 거기 앉으세요. ”

회장실 가운데에 있는 가죽 소파에 앉자, 곧 회장도 그의 앞에 마주앉았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전 여자친구분이 결혼식에 초대를 하셨다고… ”
“네. 그래서 이번주 주말에는 출근이 힘들 것 같습니다. ”
“우리 회사의 모토 중 하나가 ‘야근은 지양하고 주말근무는 피하자’니까 안심하세요. 다른 부서원들도 주말에는 출근 안 합니다. ”
“아… ”
“일단 이걸 받으세요. ”

회장은 그에게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서류봉투 안에는 새로 런칭하는 외식 브랜드에 대한 설명과 영업부 팀장으로 가서 하게 될 업무에 대해 적혀있었다.

“확정되면 다음주쯤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송재우씨가 지금까지 영업부에서 꽤 열심히 일했던 공적을 높이 사서 새로 런칭하는 외식 브랜드의 영업부 팀장을 맡길 생각입니다. ”
“제, 제가요? ”
“지금까지 송재우씨가 어떻게 일해왔는지 다른 부서원들의 평을 들어보니, 팀 하나정도는 너끈히 맡을 수 있는 역량이 있으시더군요. 이제 출근하는 장소가 달라질테니, 오늘은 다섯시부터 책상에 있는 짐들을 정리하시고 월요일에 출근하셔서는 짐을 가지고 새로 출근할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퇴근체크는 별도로 하지 않으셔도 인정해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송재우씨랑 같이 일하던 동료분들도 몇 분 같이 가게 될겁니다. ”
“…… ”
“그리고 이것도 받으세요. ”

회장은 그에게 자동차 키를 내밀었다.

“영업 나가실 때 타게 될 차입니다. 본인 과실이 아니라면 사고시에도 수리비는 회사에서 전액 지불하니까 안심하세요. ”
“감사합니다. 조심히 타겠습니다. ”
“사실 영업용으로 지급차는 차량은 업무상의 이유로 외부에 나갈 때만 사용 가능하지만, 재우씨는 특별히 이번 주말에도 사용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나가시면서 송 비서에게 물어보면 차량의 위치를 가르쳐줄겁니다. ”

그는 얼떨떨했다. 팀장급으로 가게 된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꽤 비싼 차를 지급받게 되었다. 회장실을 나와 송 비서에게 물어보니 송 비서는 주차장까지 동행해주겠다고 했고, 주차장에 도착해 그가 몰게 될 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가주었다.

“!!”

그는 차를 본 순간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차량 앞에 있는 엠블럼은,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실수로 부딪혀도 신장 하나는 떼야 하는’ 차라고 일컫는 브랜드였다. 송 비서는 원래 영업쪽 부서 팀장급에게는 어디가서 기죽지 말라고 외제차가 지급되니 신경쓰지 말고, 회장님께 들었겠지만 본인 과실이 아닌 이상 사고가 나더라도 수리비는 전부 회사에서 내준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신 게 하나 있었습니다. ”

송 비서는 그에게 검은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연예인들만 갈 법한 샵의 이용권 두 장이 들어있었다.

“회장님께서 전 여자친구의 결혼식에 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특별히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에스테틱에는 여자친구분도 함께 가실 수 있고, 가셔서 전 여자친구의 결혼식에 간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서 메이크업에 옷까지 코스로 맞춰주실겁니다. ”
“제, 제가 이걸 받아도 되는건가요? ”
“전 여자친구가 당신을 굳이 불렀다는 건, 좋은 목적이 아닐거라고 생각하셨거든요. 직원이 기 죽지 않게 하는 것도 회장의 의무라면서,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이 차량도 원래는 업무 외 목적으로 몰고 가는 건 안되는데, 특별히 이번 주말에만 탈 수 있게 허락해주셨고요. ”

그는 얼떨떨했다. 살면서 한번은 가볼까 싶었던 샵에도 가 보고, 살면서 한번은 몰아볼까 싶었던 차를 몰게 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몇몇 직원들은 일을 하고 있었고 몇몇 자리는 비어있었다.

“다른 분들은요? ”
“인사팀에서 불러서 면담하러 갔어요. 새로 브랜드 런칭한다던데 그 건으로 가나봐요. ”
“아… ”

인사팀에 불려갔던 동료들이 돌아왔다. 평소처럼 일을 하던 동료들은 다섯시가 되자 약속이나 한 듯 짐을 정리해 커다란 박스에 차곡차곡 넣고 있었다.

“재우씨, 아니지… 이제 송 팀장님인가? ”
“에이, 아닙니다. ”
“아니긴~ 재우씨 그동안 일한 거 보면, 팀장 아니라 부장 해도 되겠더만. 새로운 부서에서도 잘 부탁해, 송 팀장님. ”
“아, 그럼 이제 팀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 ”
“편하게 불러주세요. ”
“에이, 직장 생활은 예의를 차려야 하는 법인데 어떻게 그래. 차는 받았어? ”
“네. 근데 그 차, 조심해서 몰아야겠더라고요. 잘못해서 사고라도 났다간 큰일나겠던데요… ”

평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그는 처음으로 차를 몰아 집으로 갔다. 비싼 차라 그런가 승차감도 좋았다. 평소같았으면 한두명 정도는 뒤에서 경적을 울릴 법도 했지만, 고급 차라서 그런지 다른 차들도 얌전해진 느낌이었다. 퇴근하던 그는, 마침 여자친구도 퇴근했다는 얘기를 듣고 여자친구의 회사로 마중을 갔다. 도착했다는 얘기에 퇴근 준비를 마치고 왔던 여자친구는, 한참동안 그를 찾았다. 평소같았으면 회사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남자친구가 보이지 않자 당황하고 있을 때, 그는 경적을 울렸다.

“왠 차야? ”
“이번에 새로 외식 브랜드를 런칭하는데, 내가 거기 팀장급으로 가게 됐거든. 영업부서 팀장급 이상은 나가서도 기죽지 말라고 비싼 차를 준대. ”
“와, 그 회사 진짜 듣던 대로 복지가 좋네. 그럼 다음주부터는 출근도 새로운데로 하는거야? ”
“월요일에는 일단 예전 사무실로 가서 짐 싣고 새로운 사무실로 가게 될 거래. 승진도 했는데, 근사한데서 저녁 먹고 들어갈까? ”
“에이, 이 차부터 집에 주차하고 가자. 사고 날까봐 무서워. ”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힘들었을 때,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지금의 여자친구는 전 여자친구에 비하면 수수했지만, 전 여자친구처럼 허영심도 없었고, 그가 식사를 내면 커피를 사거나 다음에 만날 때 식사를 사 주곤 했다. 기념일을 챙겨야 하나 고민하던 그에게 그녀는 그냥 만난 지 몇년, 이런 날만 같이 근사한데 가서 맛있는 거 먹자고 해줬다. 명품 가방을 사 주려고 해도 명품을 들고 다니려면 사람이 먼저 명품이 되어야 한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차를 집에 주차한 그는 여자친구를 데리고 근처 국밥집으로 갔다. 뜨끈한 국밥을 두 그릇 시키고 기다리면서,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실, 주말에 결혼식에 간다고 했던 거… 전 여자친구 결혼식이야. ”
“뭐? 전 여자친구? ”
“근데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아. 그래서 회장님이 영업용 차인데 특별히 몰고 가라고 하셨던거고… 자기가 불편하다면 안 가도 돼. ”
“자기 망신 주려고 불렀나봐. 내가 아는 언니가 에스테틱 하는데, 거기 예약해줄게 들렀다가 가. 재우씨 집이랑도 가깝고, 대금은 내가 미리 내도 되니까. ”
“그렇게까지 안해도 돼. ”
“안 돼, 힘 빡 주고 가야지. 괜찮으니까 들렀다가 가. ”
“그게… ”

그는 아까 송 비서에게 건네받았던 검은 봉투를 꺼냈다.

“회장님께서 그것도 주셨거든… 자기 것까지 두 개. ”
“정말? 자기, 그 회사에 뼈를 묻어야겠다. 그럼 내일 일찍 일어나서 가자. 자기는 일찍 못 일어나니까, 내가 내일 깨우러 올게. ”

다음날, 여자친구가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곤히 자고 있는 그를 깨운 여자친구는 요기거리로 직접 사 온 커피와 빵을 건넸다. 커피는 빈 속에 먹으면 안된다면서, 빈 속에 커피를 먹게 되면 그녀는 항상 간단하게 먹을 요깃거리를 사오곤 했다.

“이거, 내가 어제 구웠어. 먹어봐. ”
“빵이 되게 부드럽네. ”
“자, 자, 어서 잠 깨고 가자. 늦겠어. ”

그는 차를 몰고 그녀와 함께 에스테틱 샵으로 향했다. 에스테틱 샵이 있는 동네는 한 블록 건너 가면 대문짝만한 건물 하나를 명품 브랜드 하나가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부유한 동네였다. 연예인들이 자주 온다는 얘기도 있었다.

“여기 연예인들도 오는데래. ”
“그럼 우리 연예인 만날 수 있는거야? ”
“운이 좋으면…? 일단 들어가자. ”
“응. ”

샵으로 들어간 그는 쿠폰 두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쿠폰을 확인한 직원은 두 사람을 안내하면서 코스에 대해 설명했다. 전신 마사지 다음에는 얼굴에 팩을 하고, 눈썹과 솜털들을 정리하고, 화장을 한다. 그리고 머리 모양까지 만들어주면 코스는 끝이라는 말과 함께 두 사람에게 가운을 건넸다. 그리고 두 사람이 건네받은 가운을 입자마자 코스가 시작되었다.

“자기 덕분에 이런데도 와 보네. ”
“그러게. 우왓- 어깨가… ”
“어깨가 많이 뭉쳐있으셔서 아픈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
“으아악… ”

굳어버린 몸을 풀고, 개운하게 마사지를 받은 두 사람은 얼굴에 팩을 하고 눈썹을 정리했다.

“머리랑 화장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
“아, 저희가 전 여자친구 결혼식에 가거든요… 최대한 빡세게 해주세요. ”
“혼을 불어넣어드리겠습니다. ”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해어 디자이너의 혼을 불어넣은 스타일링을 받은 두 사람은, 옷을 다시 입었다. 코스를 마친 여자친구를 보니 어릴 적 TV에서 자료화면으로 나왔던, 청순미녀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연예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울을 보니, 거기에는 피로에 절었던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10년은 젊어진 듯한 자신이 서 있었다.

“예쁘게 잘 됐다. 우리 자기, 어디 가서도 안 밀리겠는데? ”
“재우씨도 마찬가지인데, 뭘. ”

두 사람은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전 여자친구에게 인사를 건넬 때,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어딘가 일그러져 있었다. 뭔가, 예상과 많이 다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축의금을 내고, 부페에서 오랜만에 대학 친구를 만났다. 두 사람이 결혼식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쭉, 사람들의 시선은 신랑신부가 아니라 두 사람을 향해 있었다.

“오, 이게 누구야. 송재우 아냐? ”
“어, 주현이? 야, 오랜만이다. ”
“옆에 계신 여신분은 누구시냐? ”
“여자친구. 주혜씨, 이쪽은 대학때 친구야. ”
“안녕하세요. ”
“반갑습니다. 재우 대학교 친구 김주현이라고 합니다. ”

오랜만에 대학 친구를 만나, 세 사람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윤이가 그렇게 차버리고 갔다는 얘기까지는 들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 ”
“나 곧 팀장 달아. 회사에서 새로 외식 브랜드 론칭하는데, 영업부 팀장으로 발령났어. ”
“와, 진짜? ”
“어. 어제 팀장급으로 발령됐다면서 회사 전용 차를 줬는데 글쎄 포드더라. 살다살다 처음으로 포르쉐 카이엔을 몰아봤다니까? ”
“거기 직원 대우 좋다더니, 진짜인가보네. 근데 아무리 그래도 팀장급 차량으로 포르쉐를 준다고? 대박… ”
“승차감 진짜 좋아. 나중에 한번 태워주고싶은데, 오늘만 특별히 타고 나가도 된다고 허락받은거라 그건 힘들겠다. ”
“타라고 해도 무서워서 못 타겠는데? 잘못해서 흠집이라도 났다간… ”

결혼식장을 나선 두 사람은 간만에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주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차에 짐을 싣고, 동료들을 태우고 새 사무실로 갔다.

“송팀장님, 전여친 결혼식은 어땠어? ”
“여자친구랑 같이 가니까 전여친 표정이 완전 일그러졌더라고요. ”
“송팀장 망신 주려고 불렀었나보네. 나 이렇게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해요~ 이러려고. 송팀장 전여친이 한 짓거리를 생각해보면 백퍼야. 근데 불렀더니 꾀죄죄한 송팀장이 아니라 부티나는 남신이랑 청순의 여신이 나타났다? 아, 이거 계산 밖이거든. ”
“초희씨가 어떻게 알아요? ”
“그 결혼식, 저도 갔거든요. 신랑측으로. 근데 두 분 나타나고 하객들이 완전 술렁거렸어요. 어디서 저런 남신여신이 나타났냐고… 그때 송팀장님 여자친구분 처음 봤는데, 그 예전에 청순미인으로 책받침 여신이었다는 배우분 닮았더라고요. ”
“와… 신랑신부 기분 잡쳤겠는데? ”
“잡치긴 잡쳤죠, 결혼식 파토났으니까. ”
“앵? 파토? ”

그 날 하객으로 갔던 직장 동료의 말에 의하면, 전 여자친구가 와인을 먹고 취했는지 ‘이럴 줄 알았으면 재우씨랑 결혼하는거였는데’라는 술주정을 했다고 한다. 신부측 친척이 말려봤지만, 전 여자친구는 포르쉐를 몰고 다니는데다가 파리아 팀장이면 쟤보다 잘 벌 거 아니냐며, 이딴 잔챙이랑은 비교가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신랑이 우리 사촌오빠인데, 그 뒤로 신부가 사촌오빠 만나기 전에 송팀장님이랑 사귀던 중간에 만난거랑 그 사람을 결혼식에도 초대했다는 얘기를 했더니 혼인신고 안 하길 잘 했다고 하더라고요. 고모랑 고모부도 혼인신고 안 해서 다행이라고 하셨고… ”
“위자료 꽤나 물겠는데, 신부도? ”
“고모 말로는 미안하다고 집까지 찾아왔었는데 사촌오빠가 ‘혼인신고 안 해서 다행이고, 니 본성 알려줘서 고맙다’고 문전박대 하고 고모는 옆에서 소금 뿌렸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