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V-4. 완벽한 배드엔딩

“재민씨, 바빠? ”
“아뇨. ”
“그럼 술 한잔 하자. 나도 회사 때려쳤거든. ”
“재희씨도요? ”

그와 같이 입사동기였던 동료가 연락을 해 왔다. 회사도 그만 둔 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썰이나 풀어주겠다면서. 그는 직장 동료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아내에게는 약속이 생겨서 미안하다며 밥은 해놓고 갈테니 국만 데워서 식사 하라는 쪽지를 남기고 나왔다.

“여- ”
“재희씨…? 어째 저 나올때보다 다크서클이 더 진해진 것 같은데요… ”
“말도 말아요. 부장놈때문에 정말 고생도 이런 고생이 없었다니까… ”

두 사람은 어느 대기업의 부설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똑같은 재료공학과 전공에, 학교마저 같았다. 학번은 달랐지만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던 둘은 금세 친해졌다. 이름도 한 글자 빼고 비슷한데다가, 입사동기였던 둘을 사람들은 재재 콤비라고 불렀다.

“일단 배고픈데 뭐 좀 먹을래요? ”
“오랜만에 닭갈비에 맥주 한잔 할래요? ”
“닭갈비 좋죠. ”

닭갈비 집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닭갈비 2인분과 맥주를 주문했다. 곧 종업원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병 꺼내오자, 재민은 잔에 맥주를 따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냉장고에 있었던 맥주는 한겨울의 냉기가 생각날 정도로 추웠다.

“부장놈이 또 뭐라고 했어요? ”
“아뇨. 재민씨 뉴스 봤어요? 우리회사 얼마전에 나왔었는데. ”
“요즘 뉴스를 통 안 봐서… 무슨 일인데요? 뭐 신소재 개발에 성공한거예요? ”
“그런 걸로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아니예요. 이거 보세요. ”

재민은 재희가 건네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기사에는 ‘D공업 연구소에서 동성간 성추행’이라는 제목이 쓰여있었다.

“잠깐만… 이게 무슨 일이예요? ”
“오 부장, 그것때문에 잘렸어요. 왜, 우리 그만두기 전에 들어왔던 신입 하나 있었잖아요, 용규씨라고. ”
“아아, 기억나요. ”

재민이 회사를 그만두기 전,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던 후배가 한 명 있었다. 재민과는 인수인계를 받을 사람으로 엮여있었고, 퇴사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하곤 했던 사람이다. 짧게 다듬은 머리에 떡 벌어지는 어깨는, 조금만 더 벌크업 하면 드웨인 존슨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와이셔츠가 근육때문에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강직한 면도 있었지만, 겉보기와 달리 순한 성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사람, 죽었어요. ”
“…네? ”
“재민씨 송별회 겸 회식했던 날 오 부장이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요? 대놓고 여자친구는 있는지, 어디까지 갔는지 이런 거 물어보면서 몸 좋다고 은근히 터치했던거. ”
“아, 네, 기억나요. ”

이야기를 나눌 무렵, 종업원이 닭갈비 2인분을 가져와 가운데 팬에 부었다. 한참동안 현란하게 볶자, 맛있는 닭갈비가 완성되었다. 두 사람은 앞접시에 닭갈비를 담아 한 입씩 먹기 시작했다.

“재민씨 나가고 나서는 더 가관이었다니까. 여자친구 없으면 자기랑 만나자고도 하고,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자기도 화장실 급한 것처럼 따라가서 옆에 붙어서 볼일 보면서 은근히 훔쳐보고… 조사해보니까, 용규씨 퇴근하고 나서도 계속 만나자고 연락했대요. ”
“오 부장 결혼하지 않았어요? 딸도 하나 있는걸로 아는데? ”
“그러니까요. 와이프랑 이혼할테니까 자기랑 살자, 뭐 이런 연락을 계속 해서 상담을 했는데 회사에서도 묵인했다지 뭐예요. 그래서 죽기 하루 전날 연차쓰고 지금까지 당했던 증거들 다 모아서 방송국이며 기자며 할 것 없이 전부 메일로 보내고 자살했어요. 회사가 묵인했다는 증거까지 다. ”
“회사 난리났겠네요. ”
“출근했는데 기자들이 쫙 깔려있더라니까요? 형사도 몇 번 왔었고… 오 부장, 한동안 조사 다니느라 회사 사무실에는 붙어있지도 못했어요. 기사도 쫙 퍼졌지, 방송에도 여러번 탔지… 회사쪽에서도 일이 너무 커져서 더 이상 커버 못 치고 오 부장 자른거죠. ”
“미쳤네, 오 부장… ”

닭갈비 2인분에 밥까지 두 공기 볶아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마지막으로 남은 밥을 싹 비운 둘은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

“재민씨, 이직처는 정해졌어요? ”
“네, 다음주부터 파리아 계열사에 입사해요. ”
“와, 부럽네요. 거기 직원 대우 좋다던데… ”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퇴근한 아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와? ”
“재희씨 만나고 왔어. 오늘 퇴사했다고 한잔 하자고 해서. ”
“아… 재희씨도 그만 둔거야? 하긴, 재희씨가 자기랑 같은 날 입사했으니 4년차인가… 오 부장 등쌀에 그 정도 버틴거면 오래 버텼지… ”
“그건 그래. 참, 오 부장 잘렸다던데? ”
“잘렸다고? ”

연구비를 뒤로 해먹고도 안 잘릴 철옹성같은 빽이 있었던 오 부장이 잘렸다고? 아내는 놀라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대표이사 사촌이라던 그 오 부장이? 왜? ”
“그… 예전에 나 그만둘 때 인수인계 받았던 신입사원 있다고 했잖아? ”
“아, 기억 나. 용규씨 맞지? ”
“응. 그 친구가 죽었는데, 오 부장때문에 죽었대. ”
“그 동성간 성추행 뉴스 떴던 거 범인이 오 부장이었어? 세상에나… ”
“재희씨한테 듣기로는, 직장 내 성추행에 스토킹까지 했다더라고. 상담도 해봤는데, 회사에서 묵인하니까 기자들이랑 방송국한테 증거 다 보내고 자살했대. ”
“세상에나… ”

만악의 근원이자 철옹성이라 불리던 오 부장이 잘린 연구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아마 곧 새로운 부장급 임원이 들어올 것이다. 새로 오는 부장이 좋은 사람일지 아닐지, 그는 모른다. 더 이상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새로운 직장에 출근한 지 몇주쯤 지났을 무렵.

“재민씨! ”
“재희씨! 여기는 어쩐 일이예요? ”
“이직한 회사 주요 거래처가 여기였지 뭡니까. 전 직장 동기가 여기 근무한다니까 부장님이 좋아하시더라고요. ”
“아, 정말요? 이야,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

연구소를 나온 재희는 연구용 기자재를 취급하는 곳에 취직했다. 그리고 기자재 점검 겸, 부품 교체 겸 연구소에 들렀다가 재민을 만나게 되었다. 연구소에 있을 때 입버릇처럼 여기는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더니, 결국 그만 두고 다른 쪽으로 간 모양이었다.

“재민씨는 오 부장한테 연락같은 거 못 받았죠? ”
“나오면서 번호 차단해서요. 왜요? ”
“갑자기 장문의 문자가 오던데, 뭐 구구절절 미안하네 어쩌네 자기가 암이네 써 있더라고요. 안 읽고 삭제하긴 했는데, 이 양반이 죽을 때가 됐나 싶더라니까요. 왜, 갑자기 안하던 짓 하면 죽을 때 된거라고 하잖아요. 이따가 제수씨도 문자 받았나 물어봐요. ”
“와이프도 오 부장 번호 차단해서 못 받았을걸요? 차단하는 걸 옆에서 보기도 했고… 그나저나 암이요? ”
“암 말기래요. 암세포가 전신으로 퍼져서 수술도 못 하고, 항암치료만 받고 있다던데요? 와이프랑은 기사 뜬 이후로 이혼했다는 것 같고… ”
“솔직히 용규씨한테 한 짓만 생각하면, 이혼당해도 싸죠. ”
“그건 그래요. ”

해고가 될 것 같지 않았던 인간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잘렸다. 거기다가 고개 숙일 줄 모르던 인간이 고개를 숙였다. 욕을 그렇게 먹고 백년해로 할 것 같던 사람이 말기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역시 신은 있었던걸까, 그는 생각했다.

“다음, 오흥기씨. ”

결국 암 투병 끝에 사망한 그는, 다른 망자들처럼 명계에 도착했다. 명계의 법정에 들어선 그를 맞은 것은 뉴스에서나 봤을 법한 커다란 법정으로, 가운데에는 붉은 천을 드리운 검은 법복을 입은 남자가 있었고, 그의 양 옆으로 검은 천을 드리운 흰 법복을 입은 열두명의 사람들이 각각 여섯명씩 양 옆에 앉아있었다.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가 선언하자,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그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한 명의 법관은 질문을 뒤로 미루었지만, 나머지 법관들의 질문에 침착하게 모든 질문에 대응하던 그에게 마지막으로 짙은 파란색 머리에 짙은 파란색 수염을 가진 남자가 질문했다.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이 괴롭게 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지만,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되 아이가 없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지 모르니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만 낳아서 기르자고 제안해서 딸을 낳게 되었다. 연구실에서는 그저 한 집의 가장이자 회사의 부장으로 일할 뿐이었지만, 그런 그의 본능을 자극했던 것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용규였다. 대표이사 사촌이기도 하니 빽도 있겠다, 잘릴 일도 없겠다.

하지만 용규가 자살한 후로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매스컴의 집중포화를 맞은 회사는 더 이상 그를 보호해줄 수 없다면서 내쳤고, 가족이었던 대표이사는 그가 인재였던 사원을 죽게 만든 것에 분노하며 ‘가족들하고 연 끊길 각오 단단히 해라’는 말을 남겼다. 이 사실을 뉴스를 통해 접한 아내는, 혹여나 수험생인 딸이 고통받지 않을까 걱정했다. 천만다행히도 딸은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어 매스컴에서 딸까지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자칫 잘못하면 휘말릴지도 모른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모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내는 더는 못 참겠다며 그와 이혼했다. 귀책사유 역시 그에게 있었기때문에 위자료도 물게 되었다.

그 뒤로 혼자 살던 그는, 어느 날 혈변을 보게 되어 병원에 갔다. 그리고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암이 전신으로 퍼져서 수술이 불가능하니,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사실상 이것도 연명치료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퇴사하면서 받았던 퇴직금의 반을 아내에게 위자료로 주게 된 그는, 남은 퇴직금의 반을 치료비로 사용하게 됐다. 그 때 그를 찾아왔던, 지금 법정에서 그에게 질문을 던진 남자가 했던 말이 ‘당신이 괴롭게 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어라’였다. 그것때문에 그는 당장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장문의 사과 문자와, 말기 암으로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그게… ”
“당신은 생전에 참 지독한 인간이었더군요. 스틱스에 등재도 되었고 말이죠. 제 얘기를 듣고 풀어보려는 시도는 하신 것 같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당신을 용서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번호를 차단해서 당신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은 사람도 있더군요. ”
“…… ”
“저는 동성을 좋아한다고 해서 단지 그런 것으로 감점을 주는 사람은 아닙니다. 여기에 계신 아프로디테나 헤라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오직, 당신이 그 동안 입힌 ‘마음의 고통’으로 점수를 매기는 사람입니다. 두 법관님도 당신이 연애하면서, 혹은 결혼하면서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만 평가할 뿐이지요. ”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스틱스에 등재되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십니까? 당신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몇 명이 고통받았을지도 알고 계시겠죠. ”
“…… ”
“하데스 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판결을 마저 내려도 되겠습니까? ”
“그러십시오. ”

곧이어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성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스틱스에 등재되었을 뿐 아니라, 아내와 딸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당신의 아내는 당신과 결혼하는 동안 평생 사랑도 받지 못했고, 당신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어요. 당신의 딸이 괴로워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면서 말이죠. ”

그는 지금까지 아내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위자료 액수가 산정되었을 때도 너무 비싸면서 툴툴거리고, 미루다가 강제집행을 하겠다는 얘기가 나오자 주었다. 면접교섭에 대한 얘기도 했었지만, 아내는 딸이 보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나는 이제 당신을 보지 않겠다는 말을 변호사를 통해 전했다. 그게 아내의 마지막 전언이었다.

“제우스,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
“판결합니다. 피고 오흥기는 생전에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 스틱스에 등재된 점, 그것 외에도 타인에게 마음의 고통을 주었던 점, 결혼 생활을 고통으로 얼룩지게 한 점을 감안해 이쪽에서는 감히 산정할 수 없는 형량으로 인해 판단을 보류하겠습니다. 이 자를 카론에게 인도하여 무간지옥 1계층으로 데려가십시오. 이상입니다. ”

잠시 후, 인도자의 손에 이끌려 무간지옥으로 간 그의 귓가에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철벅거리는 바닥을 지나 관리자가 있는 곳으로 가니, 그 곳에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하얀 얼굴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붉은 입술이 매력적인 여자였다. 금으로 만든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여자는, 인도자와 함께 들어온 그를 내리깔듯 보고 있었다.

“이 쪽이야? 판결을 보류했다는 게? ”
“자료를 이미 받아보셨겠지만, 명계에서 도저히 형량을 매길 수가 없다고 합니다. ”
“알겠어. 그럼 이 사람은 여기서 맡도록 하지. 가는 김에 소각로에 들러서 재 좀 회수해가고. ”
“네. ”

인도자가 나가자, 젊은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 이런 쓰레기같은 인간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 최악이라니까. ”

그녀는 그의 등을 구둣발로 찍어눌렀다. 하이힐 굽을 통해, 묵직한 고통이 전해진다.

“윽- ”
“거기 너. ”
“아, 네. ”
“잠깐 이리 와봐. ”

젊은 여자는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 한 명을 불렀다.

“이 녀석, 꽤나 쓰레기 자식이거든? 10만년동안 너 갖고 놀아. ”
“제… 제가요? ”
“필요한 도구가 있다면 고문실에서 만들던, 사오던 할테니까 최대한 고통스럽게 해 줘. 얘, 남자를 스토킹해서 스틱스에 등재된 인간이거든. 명계에는 내가 10만년으로 보고할테니까. ”
“알겠습니다! ”

그는 젊은 여성이 불렀던 직원에게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