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V-6. 천대와 우대 사이

그녀는 오늘도 열심히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잘 돼가? ”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데이터가 많이 없어서… 투자라도 받을 형편이 된다면 알바를 모집하던가 할텐데, 그것도 아니고… ”
“하긴, 우리는 아직 학생이니… PPT 작업은 끝났어? ”
“아, 맞다… 그것부터 해야지. ”

그녀는 악필이었다. 물론 지금도 악필이다. 글씨때문에 낭패를 본 적도 있고, 몇 번 선생님께 불려가기도 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그래도 수기로 뭘 할 일이 줄어들었지만, 가끔 손으로 무언가를 쓸 때마다 고역이었다. 심지어 중학생때 한 선생은, 그녀가 악필이라는 이유로 수업시간에 대놓고 망신을 주고 수행평가 점수도 낮게 준 적 있었다. 펜글씨도 시도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코딩은 잠시 내려두고, 그녀는 발표를 위해 PPT를 만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코딩보다는 쉬웠지만 코딩보다 어려운 면도 있었다.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고, 진척도 없다보니 투자를 받기는 힘들 것 같다. 다음날, 발표를 위해 발표장으로 이동했을 때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꽤 주눅든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발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발표를 위해 같이 왔던 사람들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침착하게 사람들 앞에 섰다. 그리고 컴퓨터로 파일을 실행하자, 스크린에 ‘악필에, 악필에 의한, 악필을 위한’이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나타났다. 뭘 주제로 발표하려는건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지만, 그 외에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저는 악필입니다. 그리고 그것때문에 중학생때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대놓고 망신을 준 적도 있었고, 그것때문에 수행평가 점수 좋게 못 주겠다고 대놓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펜글씨 교정도 시도해봤는데 잘 안됐고, 저는 지금도 여전히 악필입니다. ”

그녀의 한 마디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는 하고자 하는 사업이 무엇이고, 진척도가 어느 정도이며, 만약 투자를 받게 된다면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발표를 이어나갔다. 중간중간 질문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질문은 같이 발표하는 동료가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발표를 마쳤을 때.

“본인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보면 약점이었을텐데, 대단합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

30대는 되어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투자를 받게 되면 학습용 데이터를 더 모으겠다고 하셨는데, 어떤 데이터를 모으고 싶으신건지 알 수 있을까요? ”
“다른 사람의 글씨체 데이터를 모으고 싶습니다. ”
“서체 데이터라… 현재 인공지능에 학습시키고 있는 건 발표자님의 글씨체인가요? ”
“제 글씨체와 주변 사람들의 글씨체입니다. ”
“여기서 어떻게 작동하는 지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
“확인은 할 수 있는데… 기능이 아직 다 완성된 게 아니라서요… ”
“괜찮습니다. 투자를 위해 발표하러 나왔는데 100% 완성된 프로젝트를 들고 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

그녀는 노트북을 연결하고, 프로그램을 켰다.

“이게 학습시킨 글씨체들이고, 이걸로 테스트를 해 볼거예요. ”

프로그램을 시연하자, 사진에 있던 글씨체가 서서히 모양을 바꿔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화면에는 ‘이런 글씨체는 어떠세요?’ 라는 글자와 함께 완성된 글씨체가 보였다.

“지금은 학습된 데이터가 얼마 없어서 조금 부족하지만, 제 글씨체를 넣으면 인공지능이 이렇게 비슷한 느낌의 글씨체로 이미지를 만들어주게 됩니다. ”

시연을 마친 그녀는, 더 질문이 없는 걸 확인하고 발표를 마쳤다. 그리고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아까 그 남자가 다가왔다.

“발표가 꽤 인상깊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에 인공지능을 적용하신 걸 보니, 역시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이 맞나보군요. ”
“아니예요. ”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당신의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어서 투자를 해드리고 싶은데요. ”
“!!”

그녀는 명함을 받고 두 눈이 휘둥그래해졌다. 굴지의 대기업 회장님이 투자를 하고 싶어 한다고? 명함을 본 다른 동료도 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파리아 본사에도 AI 연구팀이 있으니, 그 쪽이랑 한번 컨택해보시죠. 다음주 수요일이나 금요일 어떠신가요? ”
“아, 네, 금요일 괜찮습니다. ”
“그럼, 다음주 금요일 오후 두 시에 뵙겠습니다. AI 연구팀에는 미리 말씀드려놓겠습니다. ”

남자가 돌아가고, 한참동안 얼떨떨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은 다른 팀원들에게 연락을 했다. 발표는 마쳤고, 파리아의 회장님이 우리 프로젝트에 투자를 하고 싶다며 다음주 금요일에 미팅을 잡았다는 얘기도 같이. 그러자 현장에 가지 못했던 다른 팀원들도 놀라서 이거 꿈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파리아 회장님이? 정말로? ”
“그렇다니까? 발표 하는데 시연도 부탁하셨고 발표 마치고 제안하셨어. 옆에서 봤는데, 희연이 발표가 인상깊었다고 하셨고. ”
“와… 이건 진짜 대박인데. ”
“우리 어디가서 자랑해도 되겠는데? 다음주 금요일에 시간 안 되는 사람 있어? ”
“나 수업… 막학기만 아니었어도 째고 갔을텐데 막학기라 안되겠다… ”
“휴강이길 빈다. ”

다음주 금요일, 희연은 팀원들과 함께 파리아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안내데스크를 찾아가 B 대학교 팀 하이퍼큐브이고 AI 연구팀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데스크에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 로비로 내려왔다.

“어서오세요, 제가 파리아의 AI 연구소 소장입니다. 팀 하이퍼큐브 맞으시죠? ”
“네, 저희가 팀 하이퍼큐브예요. 오늘 오후 두 시에 미팅이 있다고 해서 왔어요. ”
“안그래도 회장님께 얘기는 전해들었습니다. 일단 회의실로 가시죠, 다른 팀원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

회의실에 도착하자,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팀 하이퍼큐브가 인사를 건네면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곧 연구소장이 음료수를 가져왔다.

“드시면서 편하게 말씀 나누시죠. ”
“감사합니다. ”
“일단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번 볼 수 있을까요? 회장님께 얘기만 들어서, 실제로 한 번 보고싶습니다. ”
“아, 네. 잠시만요. ”

희연은 컴퓨터를 연결하고 발표장에서 시연했던것처럼 연구팀원들 앞에서도 지금까지 만든 프로그램을 시연했다. 연구팀원들은 작동되는 동안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고, 팀원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보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아직 글씨체 데이터가 많지 않아서 이 부분은 나중에 보완할 생각이예요. ”
“이거 괜찮은데요? 실제로 보니까 학습 데이터가 얼마 없는 것 치고는 결과물도 잘 나왔고요. ”
“악필 교정이 아니라 손글씨를 입력하면 글씨체로 만들어주는 걸로 바꿨으면 하는데… 악필이라도 유형이 천지차이라, 가독성이 훅 떨어지는 글꼴들은 인공지능이 글씨로 인식을 못 하고 그림으로 인식할거예요. 제 글씨가 그렇거든요. ”
“글씨를 만들어준다… 대신 입력하는 사람의 손글씨 형태를 따와서 그걸 바탕으로 만드는거면, 모델 수정도 크게 할 필요 없을 것 같고요. 희연아, 이거 괜찮아보여. ”
“음… 악필 교정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이쪽도 괜찮아보여. 그러면 많은 사람들에게서 글꼴 데이터를 모을 수도 있고… ”
“일단 저희쪽에서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드리겠습니다. ”

몇 번 미팅을 마치고, 모델을 보완하면서 몇 번이나 밤을 샜다. 팀원들과 함께 보완할 것도 보완하고, 투자금이 들어와서 새로운 장비도 구매하고, 사람들을 모아 글씨체 데이터도 어느정도 모아 학습시키자 결과물이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조금만 더 보완하면 요금 받고 정식으로 서비스 해도 되겠는데요? ”
“모델쪽에 문제가 있는건가요? ”
“아뇨, 모델쪽은 괜찮아요. 데이터가 어느정도 모여서 그런지 꽤 잘 나왔어요. 그런데 글씨체를 보면 어떤 글씨체는 입력이 안 되는데, 어떤 글씨체는 입력이 되는 글자들이 있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정하면 될 것 같아서요. ”
“음… ”
“프로젝트를 하면서 생각해봤는데, 손글씨를 적게 입력하면 글꼴이 적게 나오게 되더라고요. 이걸 기준으로 정하면 될 것 같아요. 적게 입력받고 적게 만들어주거나, 많이 입력받고 많이 만들어주거나… ”

그렇게 해서 팀 하이퍼큐브와 파리아가 합작을 통해 만들어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탄생하게 되었다. 손글씨만 입력해주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글꼴을 만들어준다는 게 대중들에게는 꽤 생소했지만, 금세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팀원들은 졸업 후 정식으로 AI 연구소의 팀원이 될 것이고, 그들의 팀명으로 부서를 만들게 될 거라는 얘기도 들렸다. 언론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도 들어와 팀원들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던 와중, 희연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훈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상하고 항상 배려할 줄 아는 성격이라 둘은 한번도 싸우는 일 없이 잘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희연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남자친구의 집으로 갔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집 안에서 그녀를 맞은 것은, 그녀가 악필이라는 이유로 망신을 줬던 국어 선생이였다.

‘그럼 경오씨가… 선생님의 아들이었던거야? ‘

집 안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집에 있는 내내 불편했다.

“엄마가 자기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라. ”
“…… ”
“자기는 어때? ”
“자기야. ”
“응? ”
“전에, 내가 중학생때 악필이라는 이유로 대놓고 망신 준 선생님이 있었다고 했던 거 기억 나? ”
“어… 아, 응. ”
“그 선생님이 자기 어머니셔. ”
“뭐? 엄마가? ”
“나 그때 정말 상처받았어. 수행평가도 내가 악필이라는 이유로 점수 좋게 안 주셨던 분이고, 그걸 대놓고 나한테 말했던 분이야. 그 뒤로 난 평생 그 분을 원망했어. 아까도 인사 가자마자 숨이 턱 막혔고. ”
“…… ”

남자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친구의 학창시절을 망친 범인이 자기 어머니라는 사실은, 믿기지 않았을것이다. 적어도 집에서는, 다정한 어머니로 있었을테니까.

“사과도 필요 없고, 죽을때까지 그 선생님은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아. 미안하지만 우리는 여기까지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더 자주 볼거고, 내 가족이 되는건데 나 그거 싫어. 그렇다고 자기가 어머님이랑 연 끊을 것도 아니잖아. ”
“…… ”

며칠 후, 희연은 남자친구를 다시 만났다. 남자친구는 희연을 보자마자 더 이상 어머니를 만날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꺼냈다.

“어머님을 안 만나도 된다고? ”
“응. 절연했어. 아버지도 이해하신대. ”
“……? 아버님이? ”
“사실, 나도 악필이야. 국어선생님 아들이 악필이면 쓰냐면서 엄마가 억지로 펜글씨도 시키고 서예도 시키고… 괴발개발이라는 이유로 숙제를 다 찢어버리기도 했어. 정말 괴롭고 힘들었어. 오히려 아버지 덕에 지금까지 바른생활 사나이로 살았던거지… ”
“…… ”
“내가 엄마대신 사과할게. 이제 평생 우리 엄마 볼 일 없을거야. ”

며칠 후, 경오의 엄마로부터 연락이 왔다. 경오가 연을 끊겠다고 했다던데 아는 게 없냐는 질문에, 그녀는 제가 누구인지 기억은 하시냐면서 당신이 수업시간에 악필이라고 망신 줬던 사람이라고 했다.

“네가 그 희연이라고? ”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평생 보고 싶지 않야요. 경오씨랑도 그래서 헤어지려고 생각했고요.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가족이 되는거잖아요? 그러면 평생 봐야 하는데, 저는 아직도 선생님이 싫거든요. ”
“…… ”
“선생님때문에 망신당했던 것 때문에 수기로 쓰는 게 트라우마였어요.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준 건 팀 프로젝트를 할 때 컨택했던 파리아 회장님이셨고요. 악필은 천재라더니 정말인 것 같다면서, 인공지능을 이런 데 접목하는 건 신선한 발상 같다고 하셨어요. ”
“…… 미안하구나. ”
“죄송하지만, 선생님 사과는 받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연락도 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차단하겠습니다. ”

그녀는 차단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남자친구에게 들은 소식은, 그 국어 선생이 남편과도 이혼했고 경오에게 했던 학대 행위에 대한 증거를 남편이 남겨둔 덕에 경오에게 엄청난 액수의 위자료를 물어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 동안 경오에게 했던 짓들이 알음알음 퍼져서 학교에서도 면직되었고, 집도 남편 명의라 쫓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밥이야 알아서 벌어먹고 살겠지만, 외갓집에서도 그 동안 나한테 했던 짓 듣고 다 절연했다는 것 같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