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VI. Gelben Rose

여름이었지만 푹푹 찌던 낮과 달리 새벽 공기는 여전히 살얼음 같은 밤이었다. 밤거리에는 주점 간판의 네온사인이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주점 외의 다른 가게는 전부 불이 꺼져 잠이 든 거리였다.

“오~늘도~ 나는야 간다~ 딸꾹… ”

늦은 저녁, 회식이 있었는지 한 남자가 술에 거하게 취해 비틀거리며 도로를 걷고 있었다. 넥타이를 머리에 두르고, 한 손에는 재킷을 들고 비틀거리며 걷던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도로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순간, 자동차의 전조등이 그의 두 눈에 들어왔다.

“딸꾸욱- 어라? 여기가 어디지? ”
“어어, 안돼!!”
“……잡았다. ”

차에 치일뻔한 그를, 수수께끼의 여자가 낚아챘다. 마치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민첩한 몸놀림, 지켜보고 있었던 듯 번개처럼 튀어나온 그녀. 새하얀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붉은 눈을 가진 그녀. 가로등 불빛이 비춘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인의 피를 손에 묻힌 인간이여, 너는 절대 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선 안 돼. ”

그녀는 뜻 모를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갑자기 한기가 돌며 술이 싹 사라졌는지, 그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그는 출근을 해야 했다. 그래야 멀리 있는 토끼같은 자식들 용돈도 주고, 맛있는 것도 사 줄테니까. 요즘들어 사춘기가 온 건지 만나자고 해도 거절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 새끼들인데 어쩌겠어. 사춘기가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그는 거실 탁자에 놓인 액자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경훈아, 경미야, 아빠 갔다올게. ”

사실 사정상 두 아이는 그의 어머니, 즉 아이의 조모가 기르고 있었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활이 익숙해졌다. 아내는 나가서 며칠째 보이지도 않아서 실종 신고를 낸 상태였다.

“함 과장님, 오셨습니까? ”
“좋은 아침이야, 주대리. ”
“대리님, 어제는 무사히 들어가셨슴까? ”

주 대리는 출근한 함 과장에게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건네며, 간밤의 안부를 물었다. 사실 주대리도 회식 자리에 있긴 했지만, 그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1차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주 대리가 입사 한 순간부터 회식자리에 늘 빠짖 않는 듀오였던지라, 그는 함 과장의 술버릇에 대해 꿰뚫다시피했다. 그는 술을 먹으면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연거푸 마셔대다가 결국 몸도 못 가누고 쓰러지기 일쑤여서, 다른 직원들이 2차까지만 가면 택시를 태워서 보내곤 했던 것이다. 요즘은 아내의 실종도 있고 해서, 술을 더 많이 들이키는 모양이리라.

“와이프는 아직 소식 없습니까? ”
“찾고 있대. 제발 무사히 살아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
“꼭 찾을거예요. ”
“함 과장, 어제 부탁한 보고서는 어찌 됐나? ”

제길, 하필이면 악마같기로 유명한 김 부장이 먼저 출근해 있었을 줄이야. 그는 오자마자 주 대리와 잡담을 나누는 그가 거슬렸는지 다짜고짜 보고서 타령이었다.

“아, 부장님. 지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
“됐고, 지금 내가 부산으로 출장을 가 봐야 해서 오늘 검토를 못 할 것 같거든. 보고서는 모레까지 제출하도록 해. ”
“알겠습니다. ”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있으려는 모양이다. 김 부장이 출장이라니! 그는 말려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김 부장 앞에서 그런 티를 냈다간 분명 한 소리를 들을 게 뻔했으므로 종이뭉치로 얼굴을 가린 채 서둘러 앉았다.

‘뭔가 좋은 일이 있으려는 모양이군, 김 부장이 출장이라니! ‘

이 기세를 몰아 아내까지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루 종일 기대에 차 있었지만 그의 핸드폰은 울릴 줄을 몰랐다. 딱 한 번, 전화가 와서 기대에 찬 마음으로 받았지만, 대출 광고였다. 처음에는 기대감으로 찼던 마음이 허탈감으로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 대리, 오늘 술 한잔 어때? ”
“저 오늘은 어머니 제사라 안되겠네요. 다음에 한 잔 하죠. ”
“그런가… 알았어. ”
“함 과장님도 주말에 애들 만나려면 금주 하시고 건강 관리 하셔야죠. ”
“요즘은 원체 만날래도 만나줘야말이지… 아무튼, 그럼 나중에 한 잔 하자고. ”
“예. 전 들어가보겠습니다. ”
“그래. 내일 봐. ”

오늘도 어쩌다보니 야근, 야근, 야근이다. 이러다간 몸이 축날 것 같아, 그는 어차피 김 부장도 출장중이니 급할 거 없겠다 싶어 늦은 저녁 집으로 향했다. 거리는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간판만이 빛나고 있었다.

‘후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겠군. ‘

막 집으로 가는 골목에 다다른 그는, 집 앞을 배회하는 낯선 여자를 발견했다. 옆집에 볼일이 있는거겠거니, 싶어 모르는 척 지나치려는데, 뒤에서 그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피를 손에 묻힌 자에게 안식은 없어. ”

돌아보니, 요전날 회식을 마치고 돌아올 때 차도에서 그를 구해줬던 낯선 여자였다. 오싹한 한기가 느껴져 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저녁은 먹지도 않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집을 나서려던 그는 노란 장미 한 송이를 발견했다. 누군가 두고 간 것인지 검은 리본이 매여져 있는 장미는, 딱 한 송이가 아무것도 없이 놓여져 있었다. 꽃집에서 한 송이의 꽃을 팔 때 쓰는 포장조차 없이, 꽃대에 검은 리본만이 묶인 채였다.

‘이게 뭐지…? ‘

아내가 없는 집에, 이거라도 있으면 좀 낫겠지. 그는 집으로 들어가 낡은 화병을 꺼내, 먼지를 대충 닦고 물을 받은 다음 장미를 꽂았다. 그래도, 이런 집에 활력 정도는 불어넣어줄 수 있겠구나.

“…이제 곧, 원한을 갚아줄게. ”

그런 그녀를, 하얀 머리의 여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날은 김 부장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함 과장은 밀린 일을 전부 끝내고, 보고서까지 올려야 했다. 기왕 올리는 김에 미뤄뒀던 보고서들도 같이 올려야지, 그 기세로 그는 자정이 넘도록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그의 자리를 빼고 모든 컴퓨터가 꺼져 있었고, 건물에도 그를 제외한 사람은 없었다.

-탁

갑자기 모니터가 꺼졌다.

“이거 왜 이러지? 정전인가? ”

핸드폰을 켜고 경비 관리실에 연락을 했지만,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참동안 더듬거리며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을 때,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다행이… 이거 왜 이러지? ”

분명히 그는 손 하나 까딱하지도 않았는데, 화면에 글자가 입력돼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다른 손으로는 문제가 뭔지 찾아볼 요량으로 선들을 뒤적이던 터라 맨손이었다. 심지어 화면에 적힌 것은, 업무와는 상관 없는 것이었다.

‘타인의 피를 손에 묻힌 자는, 안식을 얻을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도,
평안한 최후를 맞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자.
그대의 목숨을 끊는 것은, 단죄자. ‘

“!!”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무언가가 빠르게 밀려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두, 두통약이… 어디 있을텐데…! ”
“소용 없어. 그 두통은 약따위로 해결 안 돼. ”

그의 뒤에 나타난 것은 하얀 머리의 여자였다. 그녀는 거대한 가위를 지팡이삼아 기댄 채,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찾는 인간이 이연화였나? 너는 그 인간을 찾을 수 없을거야. 왜냐하면, 네가 죽였으니까. ”
“그게 무슨 소리야? ”
“문자 그대로야. 니가 죽여서 숨긴 사람을 니가 왜 찾아? 자식은 왜 찾으려는데? 자식도 만나서 죽일 셈인가? ”
“그게 무슨… 으아아-! ”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러운 듯 쓰러진 그를 그녀는 가만히 보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무언가를 읽는 것 같았다.

“함기봉, 44세. 아들 함경훈, 딸 함경미. 전 아내였던 이연화. 아내의 사인은 무수한 자상에 의한 과다출혈. 아내가 죽은 이유는… 네놈의 의처증 때문이었지. 네 두 아이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로 너를 만나려 하지 않았던거야. 아니, 어쩌면 니가 니 아내를 죽일 때 보고 있었을 수도 있지… ”
“으윽… 머리가…! 너 대체… ”
“심연의 세계에 묻어둔 기억들은, 예상 외로 잔혹한 것들이 많지… 네녀석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말이야. 나는, 그런 기억들을 마음대로 읽고 조작할 수 있어. ”

두통이 가라앉았을 즈음, 그는 모든 것을 떠올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두 아이. 두 아이가 나를 만나지 않는 이유, 그리고 내가 아이를 만나려던 목적까지 전부.

사실 함기봉은 이연화를 짱사랑하고 있었지만, 이연화는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함기봉이라는 사람에 대해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과에서 인기 많은 여선배였던 반면 함기봉은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는 신입생이었다. 과 행서에도 참석하지 않던 그가 강의실에 얼굴을 내민 이유는, 처음 이연화를 보고 한눈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그는, 그녀를 갖고 싶어 미칠 뻔 했다. 아니, 이미 미쳐 있었다. 그녀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얘기가 들리면 소문의 남자를 찾아가 연화와 헤어지도록 종용했다. 심지어는 연화와 헤어지지 않겠다는 남자를 폭행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주변인을 정리한 그는, 이연화를 강제로 범했다. 그렇게 피로 물든 비극이 시작됐던 것이다.

연화는 기봉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해야만 했고, 그 아이가 첫째 아이인 경훈이었다. 그 다음에 억지로 범해져서 낳게 된 것이 둘쨰딸 경미였다. 아이도 있고 이미 결혼도 한 데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그녀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경훈이 10살쯤 됐을 무렵이었다. 경미는 아직 유치원에서 돌아오지 않았지만, 경훈은 그 날 방학식이라 일찍 돌아왔다. 그리고 경훈은 엄마가 우는 소리와 아빠가 고함치는 소리를 들었다. 어제 경훈과 학부모 참관 수업에 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이제 병적으로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철저히 내 것이 되었지만 그 댓가로 믿음을 잃고, 그는 내 것이라 여겼던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더더욱 잔인해져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저질러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정신을 차렸을 땐 겁에 질린 경훈과 경미가 울고 있었고, 손에는 피 묻은 식칼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냉정하게,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시신을 토막내 냉동실에 처박았다. 그리고 꽝꽝 얼어붙은 한떄 인간이었던 무언가를 그대로 바닷속에 빠트렸다.

경훈과 경미는 조모가 데려갔다. 아이의 할머니, 기봉의 엄마는 기봉과 연화의 일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경훈이 생겨서 원치 않은 결혼을 해야 했던 연화를 그녀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연화는 안쓰러운 여자였다. 경훈에게서 기봉이 연화에게 뭘 하는지 전부 전해들은 그녀는, 애들을 진정시키겠다는 명목 하에 두 아이를 데려갔다. 그 사건의 유일한 용의자인 경훈과 경미를.

함기봉이 경훈과 경미를 찾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히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두 아이를 죽여버리고, 연화에 대한 그 날의 기억을 심연에 묻어버리는 것.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연화는 실종됐다는 거짓말을 하고, 두 아이를 죽이기 위해 만나러 갔다. 하지만 두 아이는 매번 기봉과의 만남을 거절했다.

“그럼, 이만. ”

-쉭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피가 뿜어져 나와 옷에 튀었다. 점점 눈이 감기면서, 의식이 흐려진다.

“그대는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영겁의 시간만큼, 그 죄에 대한 벌을 받도록. ”

그녀는 기봉이 싸늘한 시신이 된 것을 확인하고 사라졌다.